1_그 남자는 거기에서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북극해에 인접한 시베리아의 끝, 추코트카 반도의 구석에 한 남자가 등장한다. 바닷가 오두막집에서 그는 홀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사방에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마치 과거 시베리아 유배지 같은 환경에서 이 남자는 빈약한 식사와 생존을 위한 활동을 이어간다. 짧은 해가 지면 옛 사진집을 뒤적거리며 북극의 밤을 보낸다. 사진집에는 한 세기 전 이 땅에 살던 원주민 축치 부족의 생활상이 기록되어 있다. 유독 코끼리의 상아를 닮은 거대한 엄니를 가져 '바다코끼리'라 불리는 해양 포유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거의 아무런 대사 없이 약간의 자막만으로 관객은 상황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요즘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마치 서바이벌 야생생활 영상을 보는 것처럼 침묵 속에 시간은 금방 한 달여가 흐른다. 점점 남자의 표정이 긴장되고 오감이 예민해지는 게 관객에게도 전염되기 시작한다.
 
어느 날 밤, 한없이 고요하게 바람과 파도 소리만 들리던 오두막의 어둠 속에서 뜻모를 굉음이 계속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새벽 어스름이 찾아오자 남자는 오두막 문을 연다. 그의 눈앞에는 경이로운 광경, '형언하기 힘든' 장대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그의 작은 오두막을 제외한 황량하던 해안 전체에 거대한 야수들이 물샐틈없이 꽉 들어차 있다. 이동 중이던 바다코끼리의 거대한 집단이 해안에 한데 모여 서로 엉켜 휴식을 취하려는 것이다.
 
하울아웃 해안의 바다코끼리 자료 이미지

▲ 하울아웃 해안의 바다코끼리 자료 이미지 ⓒ 위키피디아

 
한동안 이 대자연의 경이에 압도된 표정으로 묵묵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믿기 힘든 장관을 응시하던 남자는 오두막 지붕에 올라가 눈앞에 펼쳐진 '현상'을 휴대용 녹음기와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한다.
 
해안에는 95000마리의 바다코끼리, 여기에 더해 바다에 6000마리가 더 있는 걸로 보인다.

10만 마리의 바다코끼리가 비좁은 해안에 서로 뒤엉켜 일광욕을 하면서 남자 앞에 선보이는 군집은 아무리 봐도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상아를 닮은 발달한 엄니로 수컷들이 서로 드러누울 자리를 차지하고자 다툰다. 우리가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종종 볼 수 있듯이 샌드위치란 표현으로는 부족한 광경, 빼곡하게 포개져 정말 지나가는 건 고사하고 빈틈이라곤 없이 자리를 메웠다. 
 
남자는 "오두막이 포위당했다"라고 녹음기에 대고 말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인간 본위의 사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해안가에 자리가 모자란 것인지 호기심에서인지 바다코끼리 중 일부는 남자가 기거하는 오두막에 흥미를 보인다. 턱하고 청하지 않은 손님들이 현관을 넘어 밀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수컷 성체는 정말 코끼리를 보는 기분이 들 정도로 거대하다. 그런 덩치들이 엄니를 휘두르며 뒤뚱뒤뚱 문으로 다가오는 모습은 마치 괴수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실제로 성체 바다코끼리는 북극권 최고의 포식자 북극곰의 두 배 덩치에 강력한 엄니 때문에 곰도 피하는 존재이니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긴 하다.
 
그렇지만 다행히 바다코끼리는 그저 비좁은 해안에서 숨 쉴 틈만 바랄 뿐 남자가 지팡이로 밀어내자 투덜거리는 표정으로 물러섰다 비집고 들어오길 반복한다. 한동안 고전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광경이 남자와 방문객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1-2톤에 달하는 거대한 대자연의 경이들은 남자가 지팡이로 밀어내도 꿈쩍도 않고 철퍼덕 드러눕곤 한다. 여긴 우리의 땅인데 불청객인 너는 대체 누구냐는 표정으로. 겨우 호기심 많은 손님들을 전부 내보낸 그는 판자를 덧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물론 다음날 아침 판자는 떨어져 나간 지 오래다. 태평스러운 표정으로 바다코끼리가 마루에서 곤히 자고 있다. 남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오두막 주변을 둘러본다. 헛간에는 강아지 형상의 새끼가 두리번거리다 남자와 마주친다. 10만 마리의 바다코끼리와 남자의 동거가 며칠간 이어진다. 
 
2_위대한 종족의 몰락 위기를 목격하다
 
다시 밤이 깊었다. 작은 램프에 의지해 남자는 기록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의 육성보고는 썩 달가운 내용은 아니다. 그 남자, 러시아의 해양생물학자 막심 차크레브는 10년째 추코트카의 구석에 위치한 '하울아웃' 해안을 해마다 방문한다. 가을부터 초겨울에 이르기까지 이곳 일대에 출현하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바다코끼리 군락을 관찰하고 기록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2020년에 그가 목격한 대집단은 이례적인 경우다. 이렇게 작은 해안에 과도하게 밀집하는 건 그 자체가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기록한 뒤, 그는 지구온난화로 이들이 이동 중 휴게소처럼 이용하던 빙하가 사라지고 있는 게 파괴적 영향을 발휘한다며 독백한다. 바다코끼리는 수영에 능하지만 포유동물이기에 숨을 쉬거나 체력을 보충해야 한다. 이들은 유빙 위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먹이를 먹는다. 하지만 해수면 기온상승으로 유빙이 사라져버렸다. 중간에 제때 쉬지 못한 이들은 지치고 피곤한 가운데 쉴 자리를 얻지 못한 스트레스로 쇠약해진다.
 
어느 날 해안가를 가득 메우던 바다코끼리들이 마치 환상이었던 것 마냥 자취를 감춘다. 다시 대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해변에는 떠나지 않은 일군의 무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막심 차크레브는 해안을 거닐며 그들을 확인해본다. 하지만 그 무리는 지쳐서 쓰러지고 죽어간 바다코끼리의 유해들이었다. 이미 며칠 전에 죽은 뒤 작은 트럭처럼 불어난 성체의 사체 옆에서 어린 바다코끼리 새끼가 탈진해 있다 그가 다가오자 안간힘을 써 바다로 헤엄쳐 사라진다.
 
하지만 그 뒷모습을 응시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못내 처연하다. 과연 저 새끼가 무리에 합류할 수 있을지 가슴 졸일 관객에게 카메라의 시선은 마치 잔인한 선고를 내리는 듯하다.
 
스산한 바람이 텅빈 해안에 휘몰아치고, 곧 뒤를 이어 동토를 온통 하얗게 덮는 눈들이 바다코끼리의 시체들을 감싸서 흔적을 지운다. 눈이 뒤덮은 오두막 문에 못을 쳐 출입을 막은 뒤 단출한 살림을 정리한 남자가 해안을 떠나는 장면을 배경으로 2020년 막심 차크레브의 보고서 기록 요약이 자막으로 화면에 올라온다.

그해 하울아웃 해안 관측소가 43일간 운영되는 동안 죽은 바다코끼리는 600여 마리로 역대 최대 숫자였다. 10만 마리 중 0.6%, 남자가 본 무리 160마리 중 한 마리가 죽은 셈이다. 결코 적지 않은 희생이다. 그리고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되면서 그들이 과도하게 집중될 수밖에 없는 원인 때문에 이 희생은 더 늘어날 것이란 우려를 전하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하울아웃"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하울아웃"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Rise And Shine World Sale

 
3_시베리아와 북극해의 위기를 체험한 감독
 
도시화가 집중된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아직도 기후위기의 파괴적 영향력을 온전히 체감하지 못하고 그저 뉴스로만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한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국가에서 국민적 의제로 기후위기 문제가 대다되는 중이다.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키리바시는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 전체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을 위기에 처했다. 얼마 전 끝난 호주 총선에서 정권이 교체된 것도 거듭된 가뭄과 대규모 산불로 몇몇 주 전체가 공멸할 위기에 처한 호주 국민들의 위기의식이 상대적으로 기후위기 대처에 전향적인 정책을 펴는 정당에 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하울아웃 해안에서 바다코끼리가 겪은 비극은 처음이 아니다. 환경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를 찾아보는 이들이라면 세계적 동물학자이자 BBC 자연 다큐멘터리 해설 역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애튼버러 경의 2020년 작품, <우리의 지구를 위하여>에 수록된 2019년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바다코끼리가 북극해 해안에서 쉴 곳이 없어 절벽 위에 위태롭게 포진해 있다 떠밀려 몰살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봤던 기억이 난다. 수백만 년을 고유한 생활주기로 번성해 왔던 지구의 다른 이웃들이 인간에 의해 멸망 위기에 처한다는 건 부당하지 않은가.
 
<하울아웃> 단편 다큐멘터리를 만든 감독들은 1990년대 생 남매다. 시베리아 원주민의 혈통을 이어받아 북극을 바라보며 자라온 그들의 시선이 기후위기와 지구온난화 문제를 우리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는 건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남매 감독 중 오빠의 전작 < 창세기 2.0 >이 서울국제환경영화제 개막작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공동감독으로 참여한 해당 작품 역시 지구온난화 문제를 주요 배경으로 삼았다. 시베리아 영구동토 지대가 녹으면서 표출된 지표면에는 빙하기 시절 시베리아를 활보하던 매머드들의 유해가 가득하다. 그렇게 발굴된 매머드 화석에서 상아를 밀매하는 풍경과 함께,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혈액이나 살점에서 유전자를 채취하려는 시도가 소개된다.
 
90년대 생 시베리아 출신 감독들이 자신들의 고향에 닥친 파국을 지역 밀착형으로 담아낸 기록은 우리들의 안일한 선입견을 가뿐히 초과해버린다. 극장에서 주라기 공원 최신 시리즈에 넋을 잃고 가상의 종 보호에 고심하기보단 바로 지금 우리 곁에서 실제 우리 때문에 사멸해가는 생명들을 지켜야 할 때 아닌가?

그런 절박함을 가득 일깨우는 <하울아웃>은, 침묵으로 일관해온 한국의 우리들 앞에 시각적 충격에 이어 정서적 가책을 던진다. 기후위기를 해설하는 백 권의 책보다 더 진한 충격을 안겨주는, 잊지 못할 비주얼의 소품이다.
 
<작품정보>
 
하울아웃 Haulout
2022|영국, 러시아|다큐멘터리|25분
감독 예브게니아 아르부가예바, 막심 아르부가예브
 
2022 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2022 19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하울아웃 서울국제환경영화제 바다코끼리 기후위기 지구온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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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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