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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방전선 : 산리즈카의 여름 (1968) - 오가와 신스케 <농자천하지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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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30.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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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오가와 신스케

촬영: 오츠 고시로, 타무라 마사키

음악: 리이치로 마니베

등급 없음 / Black & White / 108분

원제: 日本解放戦線, 三里塚の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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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자천하지대본



몇 주 전에 한국수력원자력 측에서 마침내 고리 원전 1호기의 잠정 폐쇄를 결정했다. 몇년 전 일본에서 3.11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태까지 지켜보고도 꿈쩍하지 않았던 정부 하에서 운영되고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싶다. 백 번 중에 한 번은 이긴다더니 정말인가보네.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안심할만한 일은 못된다. 고리원전 1호기의 해체까지는 앞으로 최소 13년이 걸릴 전망이다. 원전 정지 후 원자로를 냉각하는데만 5년이 소비되며, 덕분에 전문가들은 한 2028년 쯤은 되어야 기기구조물을 해체하지 않겠냐며 예측 중이다. 그 사이에 노후된 발전소에서 작업 중에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어떻게 알까. 그리고 단지 1호만 영구 정지 되었을 뿐, 원자력 발전소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짓밟아가며 지속적으로 건설을 진행 중이다. 영덕, 삼척, 그리고 밀양에서. 과거부터 지금 현재까지. 그리고 짓밟히는 사람들은 서민, 그 중에서도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삶을 일궈나가고 있는 농민들이다. 조금 있으면 개봉할 박배일 감독의 다큐멘터리인 <밀양 아리랑>의 예고편을 보고 나니 생각이 나서 리뷰의 서두를 이렇게 끄적여 봤다.


 

 


자연스럽게 한 다큐멘터리, 혹은 한 사건이 떠오른다. 한국사회에서 공권력이 사람들의 터전을 강제로 밀어버리려 들 때마다 떠오르는 예시다. 바로 일본 정부의 나리타 공항 건설 사건으로, 일본의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부미의 말을 인용하자면 '전후 일본 최대의 비극' 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사건은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 하네다 공항의 이용객들이 포화 상태라는 이유로 각료들이 새로운 국제 공항을 건설해야 한다는 회의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말이 포화 상태이지, 진짜 계획은 따로 있었다. 일본은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이 벌인 베트남전으로부터 비지니스의 가능성을 본다. 미국에게 전쟁 물자를 지원하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네다 공항은 그 계획을 실행하기에 다소 작은 곳이었기에, 신공항 건설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 일본 정부는 도쿄 국제공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 있는 도미사토 지역을 비롯하여 건설 후보로 올린 지역들을 두고 간을 보기 시작한다. 당연히 지역마다 반발이 일어났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이 사안은 1966년까지 별다른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뒤바뀐 순간은 바로 사토 에이사쿠 당시 수상이 낸 하나의 아이디어였다. 나리타의 산리즈카 지역에다 공항을 짓자는 것이었다. 단 공항의 규모를 원래 계획했던 것에서 1/3 으로 줄이는 방식의 절충안이었다. 6월 22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7월 4일, 일본 내각은 산리즈카 지구의 궁내청 산하 고료목장 부근에다 신공항을 짓겠다고 결정 내리게 된다.



 


산리즈카 지구에 있는 여러 마을의 주민들은 집단 반대에 나섰다. 나리타 산리즈카 지역의 농민들은 '일본 제국' 시절에 정부의 말만 믿고 만주와 몽골로 갔던 사람들이다. 당시 정부는 호언장담 했던 것과 달리 이들을 버린다. 하지만 농민들은 굴하지 않고 나리타로 이주해서 (그들의 말에 따르면) 척박한 땅을 몇십년에 걸쳐 일궈낸다. 마침내 조금씩 농사의 결과물을 볼 때 쯤, 새로운 정부에 의해 이 사달이 난 것이다. 물론 이 와중에 마을 주민들 중 어떤 이들은 '설마, 우리 마을을 뒤엎겠어?' 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보험' 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료 목장이라는 보험이. 


해당 목장은 일본 황실에서 쓰는 농산물과 가축을 재배하려고 메이지 시대 때부터 지어져 활용되어 왔었다. 산리즈카의 어떤 주민들은 일왕이 있는 황실에서 자신들을 보호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가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람이 '국가의 일' 과 얽히게 되는 순간, 한없이 강해지면서도 또 나약해지는 법이다. 강해지는 건 '국가적인 일' 을 하기 위할 때이며, 나약해지는 건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희생될 국민들을 보호해줘야 할 때다. 고료 목장은 아무렇지 않게 메이지 시대 때부터 지켜왔던 장소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 당시 일본 정부는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토지 보상금은 일부 줬지만, 평생을 농사 지으며 살아온 농부들에게 별도의 직업이나 제대로 된 거처도 준비해주지 않는다. 농민들은 반대 동맹을 만들어 정부 인사들과의 회의를 요청하지만, 일부를 제외하고는 공청 기회를 저지당했다. 결국 이 공항 건설은 정부가 농민들과 제대로 된 상의도 하지 않은 채 멋대로 시작한 것이다. 반대 투쟁은 오롯이 산리즈카 마을 주민들의 것이 된다. 


 


* 인심좋은 빙구 같은 미소를 짓는 이 남자...가 감독 되시겠다. *



그리고 이 투쟁을 찍은 사람은 이와나미 프로덕션에서 다큐멘터리 만드는 법을 배웠던 오가와 신스케 감독이다. 그는 그 곳을 나와 '오가와 프로덕션' 을 설립한 후, 1967년부터 무려 10년동안 산리즈카 투쟁에 관한 작품을 만들었다. 첫 시작은 <하네다에서 온 기록> (왼쪽은 영어 제목이고, 원제는 <현장보고서: 하네다 투쟁의 기록>인 것 같다.) 이라는 1시간 남짓한 다큐멘터리였고, 이후 산리즈카의 마을과 농민들을 다룬 흑백 / 컬러 다큐멘터리 일곱편을 만든다. 영화사에서는 '<산리츠카> 7부작' 이라 부르기도 한다. 첫 편에 해당하는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을 마주하는 순간은, 약간의 당혹이다. 작품은 처음부터 카메라를 시종일관 해당 대상에게 무척 가까이 갖다 대며, 대부분의 순간들을 거듭되는 인터뷰로 채워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연작을 다 감상하지는 못했지만, 들리는 말로는 일곱편 모두가 이런 방식을 고수한단다.


 



 


감독은 왜 이런 방식을 고집했을까. 사진이나 영상 아카이브를 뒤섞으며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도 있었을게다. 혹은 농민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면 자료 조사를 하는 것도 방법이다. 여기 재밌는 일화가 있다. 이미 농민들이 투쟁을 시작한지 시간이 좀 지난 상태에서 감독과 스탭들이 산리즈카로 갔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 다르게 농민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찍는 것에 대해 단호히 거절했다. 대표로 감독에게 일갈한 사람은 산리즈카의 마을 촌장이었다. 


"네놈들이 농사를 지어보기라도 했나. 농사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이 땅을 버리지 못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고 싶은 농부들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면서 네놈들이 NHK 같은 놈들하고 다른게 뭐가 있냐."


맞는 말이었다. 오가와 신스케 감독은 장고 끝에 촌장에게 한 가지 요청을 한다. 조그마한 땅이라도 내주시면, 자신과 스탭들이 직접 한 해동안 농사를 짓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 다시 한 번 농민 분들을 찍어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겠다며 요청했다. 촌장의 승낙 하에 감독과 스탭들은 정말 한 해동안 농부로 살았다. 이 당시 감독은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은 영화인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화들을 보고 있으면 그가 그저 작품을 만들기에 좋은 소재였다거나, 속보의 태도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자고 접근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후에 감독은 정말 허락을 받아서 작품을 찍게 된다. 그리고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 에서 작품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 관객이 가장 처음 마주하게 되는 순간은 농민들의 밭을 마구 뛰어다니며 헤집는 측량반과 방패를 든 전경들, 그리고 으깨진 수박의 모습, 농작물을 못 쓰게 됐다며 분노에 가득 찬 채 전경들과 측량반들에게 항의하는 농민들의 모습, 전경들의 전진 경로를 무전기로 바쁘게 교환하는 다른 농민의 모습이다. 작품은 농부들이 땅에 가지는 관심과 땅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관객에게 일깨워 주려 애쓴다. 심지어 공권력이 침범하는 살벌한 풍경을 멀리서 관조하기는 커녕, 그들과 거의 인접한 거리까지 다가가서 찍어낸다. 얼마나 가깝냐면, 전경들의 얼굴이 카메라 바로 앞까지 다가올 정도다.



 


풍경이 살벌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당시 일본 정부의 자세 때문이었다. 정부는 미국에게 베트남전을 도울 물자 수송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 무슨 수를 써서든 공항 건설을 완료시킬 생각이었다. 이로 인해서 시종일관 언론이 왜곡 보도를 하게끔 유도했으며, 산리즈카 농민들의 투쟁을 일본 과격파 학생들의 급진 운동 사례로만 생각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인정사정 없는 불법 채증과 무자비한 폭력 진압을 암묵적으로 용인했다. 이런 진압에는 정부의 요구에 굴복해 땅을 팔고 나간 농민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그들은 돈은 얻고 땅을 팔긴 했으나 마땅한 직업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그런 농민들을 용역으로 만들어 투쟁 중인 다른 농민들과 싸우게 만들었다. 


그런 폭력진압을 처음 카메라에 담은 2월 26일은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 첫 촬영일이기도 했다. 그 날을 비롯해서 3월 10일, 3월 31일에 나리타 시영운동장에서 공항 설립 반대 집회를 열었다. 최종 편집본에서 이를 담은 시퀀스는 작품이 시작된지 15분쯤 넘어가고 나서 등장한다. 일본 과격파 학생들이 거론된 이유는 또 무엇일까? 투쟁에 관련된 이들에 농민들이 형성한 반대 동맹만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민들의 삶에 관한 문제 이전에, 미국에게 휘둘려 인명학살을 일삼는 베트남전을 돕게 되는 일이었다. 결국 반전을 목표로 하는 청년위원회와 일본 전학련에 소속된 학생 활동가들, 이후에는 일본 공산당원들 등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된다. 측량반이 접근하지 못하게 그저 밀어내기만 하거나, 방패를 향해 돌을 던지는 정도로만 투쟁했던 농민들은 이 때의 대규모 시위에 참여함으로써 투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하지만 이는 처음부터 폭력진압도 계획했던 일본 정부에게 그것을 실행시킬 빌미를 제공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세 번의 시위가 벌어지면서, 공권력에 의해 학생 운동가들, 농민들까지 185명이 구속됐으며 1000여명이 부상을 입게 된다. (물론 정부의 계산과 달리 이 날 진압은 결국 시위자들의 승리로 돌아갔다.)









 

오츠 고시로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처절한 전쟁과 같은 이 날의 시위를 무척 인상적으로 담아낸다. 자신이 두들겨 맞을 수도 있는데도, 기어이 전경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농민과 학생들을 향한 그들의 구타 행위를 오롯이 담아낸다. 더불어 살수차에서 최루 가스를 섞은 물이 시위자들에게 뿌려질 때도 함께 맞는다. 그래서 작품 속 카메라 렌즈에 물이 한가득 묻어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지경까지 가기도 한다. 이것은 감독인 오가와 신스케가 반대자들의 시위, 공권력의 진압을 카메라에 담아낼 때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 



 


작품의 첫 순간을 볼 때부터 감지할 수 있었겠지만, 감독은 이 다큐멘터리를 결코 '안전하게 찍지 않겠다' 고 생각한다. 감독은 카메라가 그저 관조만 하면서 머무르기만 해서는 결코 대상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가의 부름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 요량이 아니라면 당연히 반대 지점에, 그러니까 농민들의 편에 서서 작품을 만들어 가겠다고 다짐한다. 이를 위해 망원 렌즈 촬영도 배제한 탓에, 가장 가까운 거리로 돌진하여 시위 농민들과 함께 고난을 당한다.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은 심지어 농민들 개개인의 인터뷰를 할 때도 그들의 얼굴을 향해 카메라를 가까이 갖다댄다. 덕분에 관객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극영화를 보는 것마냥 큼직큼직하게 클로즈 업 된 늙은 농민들과 젊은 농민들의 아들 딸들, 혹은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것은 훗날 '오가와의 정면' 이라고 불리게 된다. 감독이 그 당시 내린 선택이 다큐멘터리의 역사 속에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기록된 것이다. 사진에 로버트 카파가 있다면, 다큐멘터리에는 오가와 신스케가 있다! 






 


클로즈 업을 통해 드러나는 16mm 흑백 필름의 강한 음영은, 관객으로 하여금 촬영 대상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바라보는 듯한 감흥을 주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움찔했던 순간이 하나 있었다.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 "모든 가족들이 싸우고 있어서 밭일도 못할 지경이다" 라고 고백하는 한 농민의 말과, 투쟁을 효과적으로 진행하려면 다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청년들의 회의를 볼 때였다.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 에서는 일단 등장하진 않지만, 실제 산리즈카 투쟁에는 농민들의 어린 자식들도 '소년 행동대' 라는 것을 조직하여 전경들과 측량반과 싸우는 등의 집단 행동을 개시했었다. 일본 정부는 이 소년 행동대 일원들에게도 폭력진압을 서슴치 않는다. 임산부도 폭행했으니 때문에 이를 두고 농민들의 투쟁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물론 주로 이 말을 한 사람들은 일본 정부 관련 인사들과 언론이었지만.)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청년들의 말도 그렇다. 


이는 시위의 어두운 면이며, 동시에 불가피한 대책이기도 하다. 농민들과 그들을 도우러 온 학생들이 폭력을 쓰지 않는 이상, 공항 건설을 강행하려는 정부는 끝까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며 더한 폭력을 휘두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관객에게 농민의 말을 통해서도 '왜 모든 가족이 투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는지' 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산리즈카 농민들이 벌이는 투쟁의 적나라한 한계이기도 하면서, 농사꾼의 삶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작품은 이에 대해 어떤 의문을 품거나 거리를 두며 상황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덕분에 농민들의 입장에서 모든 상황을 담아내려다 감독을 포함한 제작진들은 공권력에 의해 '영화인' 이 아니라 '시위대' 로 분류되기 시작한다. 때문에 농민들과 학생 운동가들을 찍고 있던 오츠 고시로 촬영감독과 작품의 조감독이 전경들에게 구속되어 구타 당하기까지 한다. 측량반원과 전경들이 오츠 고시로의 카메라와, 당시 B 카메라를 맡아 촬영하고 었던 타무라 마사키의 카메라를 손바닥으로 가리는 순간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자세와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남았다. 그러나 이를 찍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구타와 연행의 위험을 겪어야 했다. (촬영감독이 연행됐던 그 날은 투쟁 중에 15명이 체포되고, 42명이 부상당했으며 이 중 7명은 병원 신세를 졌다고 한다.) 


오가와 신스케 감독은 바로 전작인 <압살의 숲 : 타카사키 경제대학 투쟁의 기록>을 찍을 때도 그렇고, <산리즈카> 7부작의 첫 편을 찍을 때도 자신이 찍고자 하는 대상을 호응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감독이라 여기지 않고 농민들과 같다고 여기는 순간, 그로 인해 온전한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같은 장르에 몸을 담았던 후대의 감독인 하라 가즈오 같은 경우에는 오가와 신스케의 방법에 대해 어떤 위험성을 제기하기도 했었다. 세계 다큐멘터리 영화사에서 꼭 거론되는 고전 중 하나인 <산리츠카> 7부작의 첫 시작은 매혹적인 위험과 패기로 가득차 있다. 








 



* '오가와의 정면' 이 빛을 발하는 시퀀스 중 하나. 스탭들이 촬영감독과 조감독을 폭행하고 연행해간 전경들을 따라가서 그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어디로 잡아 간 것이냐며 따진다. (이 때는 타무라 마사키 촬영감독의 B 카메라로 찍은 순간들이다.) 전경들은 당신들이 알 거 없다며 답변을 거부하는데, 카메라는 이들의 얼굴을 집요할 정도로 가까이서 담아내며 물러서지 않는다.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체 하는 뻔뻔한 얼굴들, 애써 카메라 렌즈로부터 벗어나려 눈을 굴리는 전경 대원들을 담아내는 순간들이 압권이다. *



다만 감독은 첫 시작 때 견지했던 태도를 변절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가져갔고, 위험 대신 위대함의 길로 나아갔다. 이 작품이 위대한 점은 상영시간 내내 한 감독이 다른 이들의 삶을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노력해 보고자 시도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1960년대. 국가에 맞서서 외로이 투쟁하고 있는 농민들을 이해하고 알리기 위해 '카메라를 든 농부' 가 되고자 했던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방식은, '안타깝게도' 어떤 국가에서는 지금까지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이용되는 방식이다. 한국의 대추리 미군기지 건설 반대,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 반대, 그리고 현재 밀양의 송전탑 건설 반대까지. 바로 옆나라에서 벌어진 산리즈카 공항 건설 반대 투쟁의 선례를 모두가 동시대에 알고 있었더라면.. 그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실은 산리즈카의 농민들과 자신들의 처지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더라면, 한국에서 이와 다를 바 없는 비극들은 되풀이되지 않았겠지. 만약 이 비극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고 치더라도, 피해를 어느 정도로 줄일 수는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한국의 현 사회는 그렇지가 못하다. 진작에 증쇄를 중단하고 사라졌어야 할 조세희 작가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 여전히 출판되는 지금처럼, 여전히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방식이 취사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지 못한 채 필수요소가 된다. 




 


이 말은 앞으로도 산리즈카처럼 싸움은 계속 되리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대추리 미군기지 사건은 결국 마무리 되고 잊혀졌다. 그러나 강정 해군기지와 밀양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의 투쟁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 은 '환희의 송가' 가 있는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사운드트랙으로 흘러나오면서 마무리된다. 이는 사실 작품의 오프닝 타이틀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당시 작품을 찍고 있던 감독은 나리타 공항 건설 문제가 이렇게 오래 갈 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교향곡 9번의 삽입은 카메라로 다 망가져버린 농민들의 텃밭을 보여주는 와중에도 앞으로의 상황에 희망을 남겨두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가와의 정면' 이 필수적으로 사용될 수 있고, 또 사용되어야만 하는 현실은 어떻게 보면 비극이다. 그러나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든든한 것이 없으리라. 


냉정히 볼 때 공권력과 충돌해서 시민이 자신의 권리를 지켜내는 사례는 흔치 않다. 그러므로 이들의 투쟁은 일면 계란으로 바위치기 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등 뒤에 서 있는 카메라의 존재가 투쟁을 지속할 수 있게끔 편이 되어주는 것만 같다. 덕분에 관객들은 작품을 감상하며 돈이 마냥 방법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농부들이 그렇다. 농부에게 돈을 줄 테니 농사를 포기하라고 하면, 과연 그게 되겠는가. 이를 이해하는 순간은, 동시에 공권력과 싸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긴 싸움을 시작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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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작품인 <압살의 숲 : 타카사키 경제대학 투쟁의 기록>, <하네다에서 온 기록>을 촬영한 오츠 코시로 촬영감독은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 끝으로 '오가와 프로덕션' 을 떠난다. 떠난 큰 이유 중 하나는 다큐멘터리를 찍는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자세 때문이었다. 거리를 두지 않고 저렇게 뛰어들어서 과연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관점이 제대로 형성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는 것이다. 자신은 그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그는 츠치모토 노리아키 감독의 다큐멘터리인 <미나마타> 연작을 촬영하러 떠난다. (츠치모토 노리아키는 오가와 신스케와 함께 이와나미 프로덕션에서 다큐멘터리를 배운 감독이다.) 그래서 <산리즈카> 7부작의 나머지 편들은 여기서 B 카메라를 맡았던 타무라 마사키 촬영감독이 담당하게 된다.


p.s.2 - 마지막까지 투쟁한 농부들 대부분은 결국 오가와 신스케 감독과 함께 야마가타 현으로 떠났지만, 몇몇 농민들은 끝까지 남아 공항에 '알박기' 를 시전했다. 그들은 지금도 거기 살고 있으며, 청년이었던 사람들은 자체 위원회를 통해 그 곳을 떠난 농민들과 함께 대를 이어 투쟁 중이다. 결국 1995년에 이르러 일본 정부는 무리하게 공항 건설을 시도한 사실을 인정하고 농민들에게 사과를 하게 된다.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 을 촬영했던 오츠 코시로는 거의 40여년이 지난 2014년에 자신의 방식으로 나리타 공항 안에 살고 있는 농민들을 인터뷰하는 다큐멘터리를 하나 만든다. <산리즈카에 살리라 : 나리타 이야기>가 그것이다. 작품이 정식 개봉한 후 얼마 뒤인 2014년 11월 28일에 오츠 코시로 감독은 80세로 타계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p.s.3 -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작품들은 16mm 필름 상영회를 제외하면 도통 보기가 힘들다. 현재 DVD로 볼 수 있는 작품 역시 미국에서 출시된 유작 <홍시>와 2012년이 되어서야 책에다 DVD를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출시된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 뿐이다. 최근 영화제에서 그의 <산리즈카> 연작들 몇 편이 HD 버전으로 상영된 걸 보니 근래에야 볼 수 있는 여지가 보이나보다.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의 여름> 이후 찍은 여섯편의 작품들은 아래와 같다. 언젠가 이 7부작을 한글자막과 함께 2차 매체로 각 가정에서 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 처음엔 산리'츠' 카라 부르는게 맞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산리'즈'카가 맞나보다. 작품을 DVD로 볼 수 있게 도와주신 미노 님께 감사드린다.



- 일본해방전선: 산리즈카

- 산리즈카 : 제 3차 강제측량 저지투쟁

- 산리즈카 : 두번째 요새의 사람들

- 산리즈카 : 이와야마에 철탑이 왔다

- 산리즈카 : 헤타 마을

- 산리즈카 : 오월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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