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노메달은, 금메달만큼 반짝거린다

도쿄=장민석 기자 2021. 8. 7.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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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혼의 태극전사

올림픽에서 원하는 성과를 내지 못한 선수를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만날 땐 마음의 각오를 해야 한다. 모든 것을 바쳐 대회를 준비한 선수일수록 이를 지켜보는 기자의 마음도 아프다. 지난 3일 도쿄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남자 67kg급 16강전에서 6대7로 분패한 류한수(33)는 취재진 앞에서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2분여가 흘렀을까. 그는 겨우 입을 떼며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에겐 도쿄로 온 과정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지난 4월 대표팀 맏형으로 올림픽 출전권을 따낸 류한수는 아직 도쿄행 티켓을 얻지 못한 동료들의 훈련 파트너가 되어 주기 위해 세계 쿼터 대회가 열린 불가리아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코로나가 대표팀을 덮쳤다. 류한수도 귀국 직후 확진 판정을 받았다.

올림픽을 대비해 한창 훈련해야 할 시간에 병원 신세를 지게 된 류한수는 귀국 가방에 넣어뒀던 고무줄을 병실 안 가구에 묶은 다음 수시로 잡아당기며 도쿄를 준비했다. 불가리아 대회 직전 코로나에 걸려 3연속 올림픽 메달의 꿈이 무산된 친구 김현우의 몫까지 해내야 했다.

류한수가 지난 3일 도쿄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7㎏급 16강전에서 패배한 후 고개를 숙인 모습(왼쪽 사진). 진윤성이 같은 날 남자 역도 109㎏급 경기에서 용상 230㎏을 실패한 후 아쉬워하고 있다. /연합뉴스·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올림픽은 기대대로 풀리지 않았다. 류한수는 16강전에서 무함마드 엘 사예드(이집트)에게 초반 0-6으로 끌려갔다. 그는 혼신의 힘을 쏟아내 불꽃 같은 추격전을 벌여 16초를 남기고 1점 차까지 쫓아갔다. 하지만 승패를 뒤집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6-7로 패한 류한수는 “정말 어렵게 온 대회라 후회를 남기고 싶진 않았는데...”라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류한수의 도쿄올림픽은 생각보다 더 빨리 끝나고 말았지만, 팬들은 멋지게 패한 그를 격려하며 용기를 심어줬다. 포털 사이트의 응원 창엔 “땀 한 방울 한 방울이 멋있었어요. 많은 걸 배웠습니다” “금메달보다 더 큰 감동을 느꼈어요”는 등의 글이 올라왔다.

이번 대회엔 최종 성적과 상관없이 후회 없을 만큼 준비하고 모든 걸 쏟아내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는 이들이 많다. 배드민턴 여자 단식의 안세영은 세계 최강 천위페이(중국)를 상대로 선전 끝에 세트 스코어 0대2로 패하며 4강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지난 3년간 하루도 훈련을 쉰 적이 없다”며 “한국에 돌아가면 술 한 잔만 딱 하고 싶다”고 했다. 안세영은 한국 나이로 스무 살이다.

그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1회전에서 탈락한 뒤 이번 올림픽이 열릴 때까지 하루도 훈련을 빼먹지 않겠다는 약속을 스스로 지켰다. 작년 코로나 확산으로 운동 시설을 이용할 수 없게 되자 아파트 1층에서 집이 있는 45층까지 하루에 7번씩 걸어 올라갔다. 체중 조절을 위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싹 끊었다. 안세영이 “계속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밝히자 팬들도 “계속 응원하겠다”며 성원을 보냈다.

대만 화교 2세 출신으로 올림픽에 나가고 싶어 10년 전 한국으로 귀화한 진윤성(26)은 시상대에 서진 못했지만, “살면서 가장 많은 응원을 받았다”며 기뻐했다. 그는 주종목인 역도 102kg급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지 않아 어렵게 몸무게를 늘려 109kg급에 도전했다. 하지만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6위에 머물렀다. 그가 용상 3차 시기에서 동메달 획득을 위해 230kg에 도전하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는 영상에 “부상이 아니라 천만다행입니다. 파리올림픽엔 금메달 갑시다!”란 댓글이 달렸다.

오연지(31)는 한국 여자 복싱의 선구자이자 개척자다. 자카르타-팔렘방 대회에서 한국 여자 복싱 사상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을 따냈다. 오연지는 “주위에선 복싱이 배고픈 운동이니 그만두라고 말씀하시지만, 보잘것없는 나를 응원하는 팬들에게 올림픽 시상대 맨 위에 서는 모습을 꼭 선물해 드리고 싶다”며 도쿄행 의지를 불태웠다. 리우올림픽 지역예선에서 편파 판정의 희생양이 되며 올림픽 출전 꿈을 접었던 그는 ‘삼수’ 끝에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며 기대를 모았지만 16강에서 1대4로 판정패하며 탈락했다. 그래도 그는 “많은 분이 성원해주셔 정말 힘이 났다”며 마음을 추슬렀다.

장원석 성균관대 스포츠과학과 교수는 “이제 한국 팬들도 점차 메달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올림픽을 즐기게 됐다”며 “승리도 좋지만 승리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모습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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