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Quiet Place: Day One (2024)
A Quiet Place: Day One (2024) https://www.imdb.com/title/tt13433802/
주인공은 호스피스 생활을 하는 말기 암 환자다. 그는 온다고 한 기한을 넘긴 죽음이 곧 올것임을 알고 있다. 진통제와 고양이와 행복했던 날들의 기억과 시와 음악에 의지해 죽음 앞에서 벌벌 떨지 않고는 있지만 다소간 냉소적이고 침울하다. 그런 그에게 공연 관람을 위한 시내 외출 기회가 주어진다. 그는 공연이 아니라 외출 자체에 끌리고 돌아오는 길에 가게에 들러 피자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다. 공연장으로 가는 버스에 앉아 있는 그런 그의 눈 앞에 그 들뜸에 핀잔이라도 주는 것처럼, 우리 모두의 명백한 운명을 또 한번 상기시켜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차창 밖으로 공동 묘지 전경이 펼쳐진다.
마리오네트 공연은 직설적이다. 아이가 자신이 분 풍선의 양력에 힘입어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관객석에서 한 여자아이가 그 장면을 넋을 잃고 쳐다본다. 그리고 풍선이 터진다. 뉴욕의 소음이 끊임없이 내지르는 비명 수준의 소음이라는 영화가 시작될 때의 캡션은 뉴욕을 그 너무 부풀어 올라 터지고 만 풍선과 등치시킬 수 있게 해준다. 대도시 문명이 주는 자유에 귀가 막혀 그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따라서 풍선이 터지자마자 소음에 극히 민감한 외계의 괴물들이 떼를 지어 나타나 뉴욕 시민들에게 그들 자신의 단말마적 절규의 형태로 그 비명을 들을 수 있게 해준다.
살 떨리게 묘사된 그 필연적 폭발 한 가운데서 주인공은 생존 자체에는 관심 없다. 괴물에게 사냥당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곧 죽게 될 그의 유일한 소망은 죽기 전에 피자를 먹는 것이다. 고양이의 안전은 신경쓰지 않는다고 주인공을 욕해서는 안 된다. 소리 내지 않는 데 도가 튼데다 몸집이 작고 날렵하기까지 한 고양이는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맨하탄에서도 큰 어려움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인공은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그런 주인공에게 한 심약한 남자 동행자가 생기고 그 둘은 서로를 다독이고 보살펴준다. 그래서 주인공이 해야할 것 리스트에는 피자를 먹는 것 외에 고양이를 그 남자에게 맡기고 그 남자를 안전한 곳으로 도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추가된다.
그 미션을 성공시키기 위해 주인공은 고의적으로 소음을 내 괴물들을 자신쪽으로 유인한다. 이타적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빠트리는 이 행동이 그 목숨이 어차피 얼마 안 남은 목숨이라고 해서 숭고한 희생이 아닌 것은 아니다. 죽음이 자신만은 피해가기라도 할것 같은 기분으로 살아가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살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열한 짓도 마다하지 않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남자가 아슬아슬하게 괴물들의 추적을 뿌리치고 고양이와 더불어 배에 올라탄 후 이제 주인공은 '안전'하게, 즉 해야 할 것들을 해냈다는 만족감을 느끼며 죽을 수 있다. 조용한 거리를 걷고 있는 주인공이 이어폰을 귀에서 빼자 음원 플레이어는 스피커 모드로 전환되고 괴물들이 맹렬하게 달려든다. 주인공은 잔인한 죽음을 당하겠지만 그 죽음은 그의 짧은 삶이 한 순간 환하게 불타 올랐다는 사실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이 영화 때문에 나는 또 한번 깨달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세상을 바로 잡을 길이 없어도, 하늘 탓도, 세상 탓도 하지 않으면서, 누구도 칭찬해주지 않고 기록해주지 않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느끼는 자신의 행동과 생각의 차원에서 올바로, 또는 적어도 덜 나쁘게 살수 있는 개인들이 있다는 것을. 물론 우리의 주인공은 운이 좀 좋기도 했다. 타자들이, 고양이와 그 남자가 그 폭발의 순간들에 주인공 곁에 없었더라면 주인공은 기껏 피자를 먹는 정도의 사밀한 자유의 행사에 만족했어야 했을 것이다.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행사한 자유는 그들 덕분에 더 인간적인 내용을 가질 수 있었다. 조금 더 오래 생존하려고 안달복달하기보다는 더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 그리고 타자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앞당기는 그 모습은 리얼한 영웅의 모습이다. 운이 좋아 그런 영웅이 될 기회가 주어지는 이들은 우리의 주인공처럼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