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갈라놓는 최종적 심연

영화감상평

<드라이브 마이 카> -인간을 갈라놓는 최종적 심연

4 엑스트라 2 339 1

<드라이브 마이 카>

-인간을 갈라놓는 최종적 심연


efedebb2fe9b5f40674fba10e7cc796e_1683300942_8179.jpg

 

19세기에 예술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개인주의라는 사회적 현상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나의 체험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가 없고, 나의 인식은 오로지 나에게만 유효한 것일 뿐 다른 사람의 것과 합치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 상호간의 근본적 단절이라는 체험과 그것이 몰고 온 삶에 대한 무력감과 허무함이 예술의 다양한 형식 속에 널리 퍼져 나갔다.


20세기에 들어서면 '나' 또한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내가 나를 인식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며, 나는 분리된 다양한 체험들의 어설픈 조합의 결과이며 

이를 하나의 통일적인 정체성으로 결합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단지 인간은 그러한 부질없는 시도를 부단히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슬픈 존재일 따름이다.


19세기의 '관계'의 단절과 20세기의 정체성의 해체가 초래한 '심리'의 문제가 

류시케 감독의 2021년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 담담하면서도 집요하게 담겨 있다.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주인공 가후쿠의 죽은 아내 '오토'와 운전사 미사키의 어머니는 흔히 말하는 다중인격자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중인격은 현대인의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그것이 아주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면 병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과 자신이 가진 욕망 사이의 불일치라는 조건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자신을 적응시켜 나가는 방편이다. 

그래서 영화 속의 오토나 미사키의 죽은 어머니도 그렇게 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에 비해서 주인공 가후쿠와 운전사 미사키는 자신의 통일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인물들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가후쿠는 아내를, 미사키는 그녀의 어머니의 다중인격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고, 

거기에 더해 그들의 불행한 죽음은 '우리의 정체성 수호자들'에게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심리적 압박감을 족쇄처럼 채워버린다. 

그래서 이들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그리고 신비스러운 무기인 '웃음'을 상실한다. 

웃음을 상실한 이들의 삶은 비록 뚜벅뚜벅 자신들의 삶을 걸어가지만 어딘가 건드리면 무너질 것 같은 모래성처럼 보인다.


류스케 감독은 여기에 어떤 해결책 또는 간섭을 하는가? 

아니면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인가? 

해답은 사실 간단하다.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결코 열어져치지 못했던 다중인격을 그냥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곱게 쌓아 올린 '나'라는 정체성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부서지든 상관없이. 

하지만 이것이 답은 아니다. 

실제로 주인공 가후쿠가 아내의 끊임 없는 외도를 있는 그대로 마주칠 때 

그 후 그의 삶(그의 정체성)이 어떻게 될지 우리도, 가후쿠도, 류시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모름'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 류시케의 해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류시케의 아주 따스한 또 다른 해법을 상기해볼 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영화의 제목이다. 

Drive My Car! 이 말은 "내 자동차 운전하기"가 아니라 "내 자동차를 운전해!"라는 명령문 내지는 청원문이다. 

내가 가장 소중히 아끼는 그래서 늘 내가 그 중심에서 통제해야만 하는 삶(Car)을 다른 사람에게 내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완전히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자신을 비우고 그 빈 공간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 놓는 것. 

말마따나 따스한 해결책이 아닌가? 

인간 사이의 결코 넘나들 수 없는 장벽이나 심연, 그로 인해 파생되는 인간들의 고통이나 허무를 넘어설 수 있는 '상징적' 해결책이 아닌가? 

이것이 상징적인 이유는 실제의 삶에서는 불가능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류스케가 정말로 공들여 제시하는 해법은 '소통'의 가능성이다. 

앞서 우리는 인간 사이의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것이 근대 사회 이후 우리가 사는 삶의 방식이다. 

하지만 류스케는 체홉의 희곡 <바냐 이야기>를 연출하면서 어떻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힌트를 준다. 

넘어설 수 없는 언어의 장벽,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수화가 섞여서 진행되는 연극에서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은 형식적으로는 자막의 사용이겠다. 

하지만 류스케는 내용적으로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배우들이 자기의 대사만 외우는 것이 아니라 연극 전체의 대사를 '감정 없이' 계속 읽어나감으로써 전체 연극을 하나로, 통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나'의 대사, '나'의 연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체 소통의 그물망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소통의 그물망을 모두 자기의 것으로 만들게 되면 그 후에는 누가 어느 언어로 말을 하든 

거기에 감정이 실리게 되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고 기적과 같은 그 무엇이 일어난다고 류스케는 말한다.


정말 그럴까? 

'나'의 중심성을 비우고 운전석을 남에게 내맡기거나, 

아니면 '나'의 대사가 아니라 전체 소통의 그물망을 통으로 체화함으로써 인간은 파열된 DNA를 복구할 수가 있을까?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 신고
 
2 Comments
20 zzang76  
전 좀 지루하게 봤습니다 ㅎㅎ
10 사라만두  
햇볕이 가져다 주는 상징성이 자신이 처한 환경값에 따라 지옥 내지는 생명의 그것으로 치환되듯,
'파열된 유전자' 또한 내 조건의 당위로 인해 다른 맥락으로 기능함을 우린 모두 알고 있다고 봐요.
문화성이라는게 학습된 주체성의 다른 이름이라 생각하기에, 허무주의가 낳은 폐단이라는 이름도
사실은 공허한 방을 채워나가는 인생의 또다른 진로찾기로 대체할수 있지않나, 그런 마인드로 살아가는 1인입니다 ㅎ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