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가지의 이야기

영화감상평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 두 가지의 이야기

1 lumiere 0 83 0

더 많은 글 ->https://blog.naver.com/leejunha0928





본편과 전편 <나이브스 아웃>, 그리고 <현기증>에 대한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1

개인적으로 가장 비평하기 어려운 영화 장르가 있다면 추리 영화, 그 중에서도 후더닛 무비일 것이다.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과, 그 안에서의 탐정 캐릭터의 추리의 긴박함을 주 동력으로 삼는 이 하위장르는 사실, 필자에게 벅찬 감이 없지 않다. 우선 정보량이 과다하다. 인물의 관계와 갈등 상황, 거기에 관객과 벌이는 두뇌 싸움, 퍼즐의 힌트들까지 많아도 너무 많다. 따라서 후더닛 무비는, 한 숏의 잉여도 허용하지 않는다. 서사는 관객을 그것의 게임으로 멈추지 않고 몰아간다. (예외가 있다면 로버트 알트먼의 2001년작 <고스포드 파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인물은 개인이라기보다 관념으로 제시되며, 서사는 추리에 전혀 관심 없는 듯 주변을 서성인다. 이 영화가 기억에 남는다면 그것은 누가 살인사건의 범인인가가 아니라 영화 중반, 계급의 상층과 하층을 넘나드는 미국 배우의 노랫소리일 것이다.)

후더닛 무비의 피로함은 물론 개인적인 것이다. 누군가는 퍼즐과 두뇌게임을 충분히 즐긴 다음, 그것에 대한 상세한 해설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럴 능력이 없으며, 이 지면에서 다루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상념들은 남는다. 누가 범인인가를 밝혀내는 쾌감의 중핵에는 무엇이 있는가. 두뇌게임은 어떻게 영화와 관계 맺는가. 파이 던지기라는 행위가 영화였듯이, 그것 자체로 영화가 될 수 있을까. 물론 명확히 정돈된 대답은 없을 것이며 아마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우선은 영화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개별 영화와의 대화가 때로 거대한 담론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며, 그렇다고 믿는다.

2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이하 <글래스 어니언>)을 보았다.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결말의 쾌감이 적다는 것이다. 분명 영화는 상대적으로 사회적인 약자의 위치에 놓인 여성이, 그 위의 부르주아를 상대하여 승리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결말부의 온갖 난장과 파손, 그리고 폭발에도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 기인한 것 같다. '도대체 무엇이 바뀌었는가?' 죽은 카산드라 브랜드의 동생 헬렌 브랜드는 언니의 복수자로서 임무를 완수하지만, 거기까지이다. 억만장자 마일스 브론은 이제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붕괴자들' 클럽은 이제 각성한 듯 새 삶을 찾아 나설 것이다. 브누아 블랑은 속편에서 또다시 다음 사건을 찾아 나설 것이다. 이제 헬렌이 남았다. 영화의 마지막, 블랑은 헬렌에게 '그 개자식 잡았나요?'라고 묻는다.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결국 헬렌은 '잡는 자'이다. 잡는 행위 외에 이 인물에게 부여된 서사적 역할과 기능은 없다. (헬렌은 어쩐 일인지 한 번도 탐정 혹은 수사 기법을 배운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청과 감시, 미행 등을 블랑만큼이나 완벽하게 수행한다.)

이 선택은 영화의 전편, <나이브스 아웃>의 결말을 생각한다면 의아한 것이다. 전작의 히로인 마르타는 할란 트롬비의 저택을 상속받는다. 외지인이었던 그녀가 2층 발코니에서 '내 집, 내 규칙, 내 커피'가 쓰여진 머그컵을 들고 바깥의 가족들을 내려다보는 롱 숏의 쾌감이, 2편의 결말부의 그것보다 크다. 마르타는 어떠한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도 완전한 전복을 이루어낸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몰락한 메인 빌런을 제외한다면 1편에서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인물(들)은 트롬비 일가이지만, 2편에서는 '붕괴자들'이 아닌 헬렌이다.

이유는 더 있다. 헬렌의 복수극은 카산드라의 대리전이다. 헬렌은 카산드라 살해의 배후를 파헤치기 위해 카산드라로 변장하여 저택에 잠입한다. 그러나 관객은 영화의 변곡점, 즉 카산드라는 죽었으며 헬렌이 변장한 것이라는 사실에 이르기 전까지 카산드라에게 감정이입할 틈이 없다. 영화의 유머는 브누아 블랑이 담당하며, 카산드라는 어딘가 묘한 구석을 감추고 있는 알 수 없는 여인일 뿐이다. 그랬던 그녀가 후반부에 이르러 복수의 주체가 된다. 여기서 필자는 '그녀'라고 칭했다. 물론 서사 안에서 복수의 주체는 카산드라가 아니라 헬렌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한 내적 논리를 내세워도, 관객의 눈엔 둘은 마치 동일인물처럼 보인다. 동일인물처럼 보이는데 다른 사람인 척 한다. 카산드라를 연기하는 헬렌, 그 전의 헬렌, 재판장에서 잠깐 비춰지는 진짜 카산드라. 그 유명한 <현기증>의 매들린과 주디처럼, 인물은 응집되지 않고 파편으로 제시된다. (<현기증>의 매들린과 주디는 사실 동일 인물인 것으로 밝혀진다. 한 명의 배우가 2개의 인물을 연기하다 그 인물이 하나로 융합될 때, 히치콕은 그것에서 일체(一體)의 기묘한 잔상을 이용한다. 그러나 카산드라와 헬렌은 끝까지 개별 인물로 남는다.)

영화는 파편화된 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할 것을 요구한다. 마지막 장면의 과도한 난장은 그래서 살짝 불편하다. 말하자면 억지 신파 영화들이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최루성 눈물을 강요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억지 쾌감을 주입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 쾌감을 증폭시키기 위해서 글래스 어니언은 폭파되어야 한다. 폭파의 스펙터클이 서사의 공허함을 위장한다.

사실 <트랜스포머> 시리즈나 <본> 시리즈나 액션이 안 보이는 건 매한가지다. 그러나 <본> 시리즈에서의 액션에 더 동의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입하여 따라온 인물이 적대적 상황에 몸을 던져 부딪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나이브스 아웃> 1편에도 동의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본편의 주인공 마르타도 마찬가지로 부딪힌다. 할란 트롬비의 유언대로 살인범임을 피하기 위해 행동하며, 심지어 불리한 증거를 은폐하기도 한다. 악역으로 밝혀지는 랜섬에게 잠시 의지하여 블랑과 경찰에게 쫒기기도 한다. 또한 이 인물은 어딘가 어설프다. 저택을 타고 내려올 때 사다리의 약한 부분을 밟아 부숴뜨리는가 하면, 결정적인 증거(운동화에 묻은 미세한 핏자국)을 내내 발견하지 못하고 지니고 다니기도 한다. 인물의 어설픔과 약한 모습, 그럼에도 나아가는 모습은 자연스레 관객을 설득한다. 마침내 결말에 이르러 완수된 사건은 그래서 더 큰 감정의 진폭을 선사한다.

헬렌은 혼자 정의롭다. 그 정의로움은 물론 고고하며 칭송받을 만한 것이지만, 어째서인지 이입하기 힘들다. 영화 속 분량만 고려한다면(고려하지 않는다면 헬렌은 어떤 인물이 될까.) 헬렌은 완벽한 인간상이다. 결점 없는 주체가 외부의 악을 무찌르는 이야기. 그래서 결국 스펙터클을 요청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이야기 기술 혹은 극작술은 결국 빛을 다루는 기술이며 그것은 결국 어둠을 다루는 기술이다. 필자는 <본>을 기대했으나 <트랜스포머>를 보았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 신고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