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과 환각

영화감상평

비명과 환각 <The Nanny,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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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h Holt
Bette Davis



표면적으로는 가족의 복원을 이루고 영화는 끝이난다. 그러나 복원된 가족의 위치는 뒤바뀐다. 아니 실은 늘 원래 그 자리였다.

마지막 쇼트에서 조이와 엄마가 모든 오해를 풀고, 다시 봉합되는 공간은 병원이다. 중산층 가정의 실체는 곧 증상이라는 은유이다.

의사의 전화를 받고 도착한 빈민가에서 베티는 여동생의 죽음을 본다. 여동생은 산부였고, 태아 역시 함께 죽었다. 의사는 베티에게

책임을 묻는다. 베티는 밖으로 나와 심한 현기증과 메스꺼움을 느낀다. 이건 꿈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꿈이 아니었다.

그녀가 본 것은 실재였다. 25년 동안 보지 못한 상징질서 내의 실재를 본 것이었다. 이어 중산층 가정에 돌아오니, 수지가 죽어있다.

베티는 이중의 죄책감을 떠 안는다. 여동생과 태아를, 그리고 수지를 죽인 살인자가 된다. 그리고 환각이 일어난다.

베티가 집에 돌아와 (사실 베티는 자신만의 집이, 가족이 없다), 수지를 찾아 욕실로 들어서는 쇼트는 두 번 반복된다. 그것은 자신이

본 것이 꿈이라 믿고 싶은 욕망과 그것이 사실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오는 혼란에 기인한다. 그것의 미장센은, 욕실의 행거와 문, 바닥과

벽의 수직적 프레임 한 가운데에 베티를 놓고, 앙각으로 가둬 버린다. 이어 베티의 시점샷으로 이어지는 욕조 안 수지의 삶/ 죽음의 숏/ 역숏은,

상징계와 실재의 경계 사이의 그녀의 혼돈과 악몽을 은유한다.

결국 수지가 죽은 것은 사고사였으며, 그 책임은 가족 구성원과 베티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조이는 베티가 범인이라고

단정한다. 이는 조이가 상징질서 내 아비의 처벌 권능을 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아비는 영화 초반에만 잠시 보일 뿐, 이후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아비가 가장 비열하고, 그런 점에서 아비는 서사 어디에나 등장한다. 조이는 그를 여왕의 심부름꾼이라고 부른다).

가부장제, 핵가족 이데올로기를 다시 복원하려면 범인이 있어야 하고, 그 범인에게 모든 죄책감을 투사해야 이 도착된 질서가 다시 안전하게

보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티가 범인이 되는 이유는, 그녀가 중산층 가정 경계 밖에 위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베티가 아무리 사랑과

헌신으로 가족들을 돌본다해도, 그녀는 가족 밖 타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독은 질문을 바꾼다. 범인이 누구냐에서, 그 사고의 원인은 무엇이냐로. 베티의 외출을 통해 알게된 여동생의 죽음과 가난은,

서사의 무의식적 층위에 있던 갈등의 원천을 서사의 본질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 대립은, 조이와 베티와의 관계에서,

중산층 가정과 베티의 빈민 가정과의 관계로 이동한다. 오프닝에서 호수와 공원을 끼고 깨끗한 놀이터에서 노는 중산층의 아이들과

베티가 동생을 만나러 찾아간 빈민가의 더러운 바닥에서 아무렇게나 노는 아이들의 대비되듯, 그녀의 본래 위치는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그곳은 배제된 자들의 공간이고, 죽음의 공간이다. 물에 둥둥 뜬 채 이미 죽은 수지와 자궁 속 태아는 같은 모습의 죽음이라 유비되겠지만,

맥락은 서로 다르다. 그 경계에서 베티는 환각을 보고 분열한다. 그 공간적 차이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가진 위계와 배타성에 기인한다.

따라서 그 실재를 본 베티는 처벌된다.

그리하여 가족은 복원 된다. 그러나 그것은, 벌거벗은 조이가 의사 까운을 입듯, 아비의 또다른 대리인인 위층의 의사가 베티를 간단하게

정신병자로 진단하듯, 도착된 복원일 뿐이다. 결국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원인은 사라지고, 죽음만이 남는다 *LMDb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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