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프 샤힌 감독의 탕자의 귀환 영화 감상평

영화감상평

유세프 샤힌 감독의 탕자의 귀환 영화 감상평

1 인생은로시니처럼 1 134 0

영화 <탕자의 귀환>은 놀라웁게도 이집트 감독인 유세프 샤힌의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고 콥트교인가보구나 하고 확인차 찾아보니 콥트교인이 아니라 Melkine그리스카톨릭교도 출신이다. 정교회 지역 안에서도 서방교회(로마카톨릭)를 지향하는 교회가 있는데 그 중의 분파로서 대략 처음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탄생한 안디옥을 중심으로(시리아북부와 터키 남부를 의미하는) 펼쳐진 종파인가보다. 그렇다고 이 분파가 주장한 것 처럼 안디옥교회에 직접 뿌리를 두었다기보다는 이 분파가 탄생한 17세기 경 정치적 지형하고 맞물려 형성된 종파이지 않느냐 싶다. 어쨌든 감독 본인은 자신의 종교를 묻는 질문에 이집트라고 대답하곤 했다고 한다.

탕자는 정치범으로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후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귀환한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리라는 기대감이다. 그의 약혼녀에게도 노동자에게도 젊은 조카에게도 그는 새로운 삶을 가져올 구원자이다. 억압자인 자본가 가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재산 소유자인 약혼자는 해방을 꿈꾸고 자신의 임금마저 저당잡힌 채 이주의 자유마저 거부당한 노동자는 새로운 도전을 상상하며 우주과학자를 꿈꾸는 가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에게는 그의 꿈을 실현시켜줄 새로운 돌파점이다. 이런 그가 마침내 귀환한다.

변하였는가? 여전하다. 이주를 꿈 꾼 노동자에게는 가인이 구사했던 동일한 논리가 구사되고 우주과학자를 꿈꾸며 유학을 결심했던 조카에게 인내를 이야기하며 약혼자에게는 확실한 신뢰를 주지 못한다. 아니 분명하게 그는 이미 잊어버렸다. 그는 약혼자의 이름도 잊어버렸고 죽마고우 노동자 친구는 못 본척 스쳐 지나가버렸고 조카는 아예 기억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이다.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이다. 그 약혼자는 지쳐 그 기다림에 깊은 회의를 품게 되고 노동자는 가인에게 처럼 싸움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고 조카에게는 아버지 가인과 무늬만 다른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그는 이미 허무주의자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싸워봤더니 소용없더라 그게 그것이더라. 그래서 남은 것은 가인과 동일한 욕망 뿐이었다. 사랑 없는 약혼자의 결혼 노동자에게는 자본의 논리의 반복 조카에게는 떠나봤자라는 허무주의 주입.

아 슬프게도 탕자는 지옥으로 귀환하였던 것이다. 아니 스스로 지옥에 몸을 던져버린 것이다. 악마의 유혹을 견디지 못한 맘 좋은 파우스트 탕자. 자신의 아들을 위해 살인마저 서슴치 않을 어머니 마리아의 이기주의적 욕망에 스스로 무너져 내렸고 자본가라는 어설픈 외투를 입은채 친구 노동자들 마저 저버리고 자본가 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를 향해 부끄러움으로 내달리던 탕자는 사라졌다. 주저주저 마을 입구에서 슬픈 얼굴을 지녔던 탕자에게 오직 남은 것은 악마와 타협한 파우스트 뿐.

감독은 어설픈 희망을 전달하지 않는다. 피가 낭자한 결론을 제시한다. 가인에 의한 탕자의 살해와 약혼녀에 의한 가인의 살해. 탕자의 결혼식은 피의 결혼식이다. 어느 하객도 존재 않는 단지 탕자의 그나마 뒤늦은 결심이 불러온 살육의 공간일 뿐이다. 오직 남은 것은 예수의 도피 뿐이다. 사랑하는 여인과 더불어 과감히 탐욕의살육을 탈출하여 저 드넓은 우주를 꿈꾸는 이에게 마지막으로 기대하는 감독의 실낱같은 희망 뿐이다. 그래 지옥은 탈출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불평 불만과 환멸 가득찬 이 세상에 너는 무엇을 바라는가 참된 자유? 참된 평화? 그래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길은 저 헤롯의 참혹한 살육의 현장을 벗어나는 길이다. 때론 도피가 최선의 선택이다. 환멸만으로만 바라보아야 볼 수 있는 이 세상 눈은 하늘을 향한채 발은 땅에 굳건히 내딛고 내달리는 것이다. 사랑을 품은 채 손을 꼭 부여잡고서.

축복있으라 떠나는 이들이게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 신고
 
1 Comments
2 킹오뚜기  
예전에는 인도 영화 많이 봤었는데 요즘은 좀 유치한거 같아서 못 봤는데, 이 영화는 한번 봐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