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들를 위한 영가 <Thunderbolt, 1929>
Director Josef von Sternberg
Stars George Bancroft
스턴버그는, 1929 대공황 직전, 무성과 토키 사이, 대단히 이상하고 낯선 공기의 디제시스를 만들어낸다. 이 낯선 공간에서,
카르네, 데 시카, 다케시 등의 인물을 연상시키는 죠지 밴크로프트는, 표현주의적 미장센과 연속되지 않는 연속편집 속에서,
사운드-온으로 대화하다가 뮤트-온으로 행동한다. 그러고는 괴상한 아이러니와 농담같은 운명을 비웃으며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다.
오프닝에서, 고양이를 따라 수평이동하는 카메라는 연인들의 다리 사이를 노골적으로 횡단한다. 이후, 카메라는 길 잃은 개를
따라 역시 수평이동하는데, 개는 밴크로프트의 다리 앞에서 정확히 멈춰선다. 우연 (혹은 필연적으로) 개를 만난 이후 그는,
여인에게 배신당하고 투옥되며 사형당하기에 이른다. 고양이에서 개로의 전환, 말하자면 영화는 고양이와 개의 상징화를 통해,
쾌락의 20년대를 지나 대공황의 30년대로의 전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프리코드 시네마의 서사적 코드를 따르는 결말, 즉 밀주,
플리퍼, 갱의 20년대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물론 30년대 갱스터필름을 통해 이들은 사회비판적 갱들로, 40년대 필름느와르를
통해 주류남성사회를 위협하는 팜므파탈로 거듭난다).
그러나 스턴버그는, 프리코드시네마에 의한 20년대의 죽음, 그 죽음을 밴크로프트를 통해 농담으로 응수하고, 그것에 어떤
숭고함마저 깃들게 한다. 그가 감옥에 입소하는 시퀀스의 첫 쇼트는 그의 운명을 암시하는 흑인영가가 흘러나온다. 가사는
구슬프되 리듬은 매우 경쾌하다. "요단강아 흘러라x2. 요단강 물소리 들으러, 죽어 천국에 가고싶네", 소장마저 "리츠 호텔보다
편할거야"라던지, 그와 다른 재소자의 대화 ""테너야?/ 난 테너들을 죽이지/ 어제 4중창 중 테너 하나가 죽었어 (네가 들어와)"
이처럼 영화 중반부터 결말까지, 감옥에서의 시퀀스 내내, 매일 한 명 씩 사형당하는 그곳에서, 재소자들과 밴크로프트는
죽음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나 긴장은 온데간데 없고, 대신 온통 농담으로만 일관한다. 말하자면 죽음이라는 것을 추상화시켜
농담으로 극복한다는 어떤 실존주의. 밴크로프트는 형장에서의 마지막에서도 농담을 잊지 않는다. 간수에게 담배불을 빌리며
"나 금연할까봐"라더니, 그의 이름을 듣고는 박장대소하며 프레임-아웃한다. 말하자면 그는 비극, 혹은 죽을 운명으로서의
세상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초월적 태도를 드러낸다. 이는 검열에 대한 스턴버그의 사려깊은 전복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밴크로프트는 길 잃은 개로 은유되는데, 그와 개는 대단히 독특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의 기나긴
도주행각은 개의 방해 때문에 체포되고 마는데, 오히려 그는 개와 친구가 되고, 나아가 개는 배신한 연인 릿찌를 대신하는
대상으로까지 환유된다. 그가 감옥에서 "내 것이 아닌 걸 가지려는 버릇이 있었지. 그래서 내가 여기있는 거야"라고 말하자,
커팅되고 감독은 릿찌 대신 개의 쇼트를 갖다 붙인다.
더 나아가 개는, 그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담지자로까지 승화된다. 감옥에서 그는 언제나 개와 함께하는데, 릿찌와 밥의
결혼식 장면에서 그는 자신의 범죄에 대해 그리고 편집증적 사랑에 대해 참회하기에까지 이르게된다. (물론 어차피
사형당할 운명이었지만) 그리고 그는 개와 함께 형장으로, 속죄하듯, 유쾌하게 걸어간다. 재소자들의 4중창의 영가 혹은
만가와 함께. 걸작!! *LMDb 9.3
ps. 그가 죽으러 가는 길, 옆 방 재소자와의 마지막 인사 " 잘 있게, 짜리몽땅 / 엽서 보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