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갑자기 초라해졌을까? -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1958)

영화감상평

그들은 왜 갑자기 초라해졌을까? -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거대한 서부>(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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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루다가 글을 썼는데 장문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실 분들에게 미리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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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와일러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의 영화만큼이나 따분한 일이다. 누가 '와일러 감독의 영화 중 그래도 꼭 봐야 할만한 영화가 없수?'라고 내게 묻는다면 약간 거드름을 피우며 다음과 같은 목록을 펼쳐 놓을 것 같다. '<공작부인>(1936), <제저벨>(1938), <편지>(1940), <작은 여우들>(1941)은 꼭 볼 것! 여건이 되면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6)까지만 보고 잊어버릴 것!'

아무리 생각해도 윌리엄 와일러의 최고작은 <공작부인>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이 영화에 다 썼다. 그리고 이후의 영화들은 뒤로 갈수록 점점 나빠진다. 와일러가 자신의 명성을 생각했다면 <우리 생애 최고의 해>까지만 만들고 은퇴를 했어야 했다. 그 영화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 다만 시민을 계몽하기 위한 선동성이 조금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해도 '<우리 생애 최고의 해>가 와일러 생애 최고의 영화'라고 우긴다고 해도 수긍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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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윌리엄 와일러, 오손 웰즈, 앙드레 바쟁


 와일러는 할리우드에서 황제로 군림했지만 조롱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보다 열 세살이나 어린 오손 웰즈의 다음과 같은 일화가 대표적이다. 어느 날 누군가 웰즈에게 물었다. "윌리엄 와일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잠시 생각을 하다 싱긋이 웃으며 오손 웰즈가 말했다. "뛰어난 프로듀서지요". 감독이 아니라 프로듀서. 그것은 사실 엄청난 욕이다. 와일러는 영화적 개성도 없고. 관심 있는 주제도 없으며 카메라 언어에 대한 적절한 이해도 없다는 말이다. 그의 영화는 재봉사가 옷감에 딱 맞게 양복을 만들 듯이 예산에 맞추어 만들어졌다. 완성품이 깔끔하고 균형에 맞다는 것이 작가로서 갖추어야 할 통찰을 대신했다. 물론 와일러의 편에서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도 있었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평론가 앙드레 바쟁이 그의 변호인이었다. 바쟁의 변론(1948년에 쓴 <윌리엄 와일러 - 연출의 장세니즘>)을 여기에 구태여 옮기지는 않겠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고,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알려줘도 계속 관심이 없을 내용이기 때문이다. 10년 뒤 바쟁은 윌리엄 와일러를 적극적으로 방어한 자신의 글에 멋쩍은 각주를 달았다. 그 각주는 와일러를 변호한 자신을 변호하는 것처럼 궁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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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 전차 경주 장면보다 더 뛰어난 <작은 여우들>의 베티 데이비스의 눈동자


하지만 바쟁은 운이 좋은 평론가였다. <벤허>(1959)를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벤허>에 대해 가장 인상적인 평은 마틴 스콜시지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3시간이 넘는 이 지루한 종교 영화에서 유일하게 볼 만한 부분은 10분도 채 안되는 전차 경기 장면 뿐이다'. 하지만 <벤허>의 그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는 전차 장면도 <작은 여우들>에서 남편이 등 뒤에서 죽어가는걸 모른 척하며 베티 데이비스가 눈동자를 천천히 굴리는 장면보다 못하다.

와일러의 경력이 쌓일 때마다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점점 식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자제력은 냉담함으로 변했고 좋은 취향은 자기 만족적으로, 진지함은 거드럼으로, 기술적 성취감과 명료함은 시시하고 둔감함으로 바뀌었다. 급기야 <진정한 해방>(1970)과 같은 어이없는 영화를 만들고 후다닥 왕좌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오래 된 추억담 같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실 최근에 와일러의 <거대한 서부>를 스크린으로 봤기 때문이다. 미리 말해두는 것은 이 영화를 보고나서 와일러에 대한 나의 시각이 바뀌어서 석고대죄의 글을 쓴게 아니라는 점이다. 굳이 말한다면 '메이저 리그 9번 타자설'과 같은 글이다(이 말의 뜻은 이 글의 끝에서 밝히겠다).

<거대한 서부>는 영화의 전당 여름 기획전에서 내가 맨 마지막으로 본 영화다. 이미 오래 전 안방 극장을 통해 봤을 뿐더러 영화의 전당 스크린 크기에 안 맞는 와이드 스크린 화면비, 귀를 막고 싶을 정도 자주 울려퍼지는 과잉의 주제곡, 러닝 타임 2시간 46분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지루한 전개... 굳이 이런 영화를 볼 필요가 있을까 싶어 자리를 떠려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장면 설명을 위해 약간의 줄거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직 선원인 제임스 맥케이(그레고리 펙)는 약혼녀 패트리샤(캐롤 베이커)를 만나기 위해 동부에서 서부로 온다. 패트리샤의 아버지 헨리 테릴은 그곳의 목장주인데 또 다른 목장주 해너시 일가와 땅을 두고 오랫동안 대립하는 사이. 맥케이가 서부로 도착하자마자 해너시 집안의 아들이 시비를 걸지만 맥케이는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두 집안의 대립이 극에 달하게 되자 맥케이는 또 다른 목장주인 줄리(진 시몬즈)를 만나러 먼 길을 떠난다. 줄리는 마라곤 집안의 딸로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땅을 물러 받았다. 줄리가 소유한 땅에는 테릴 집안과 해너시 집안의 말들이 목을 축이는 엄청난 규모의 강이 흐르고 있어서 테릴과 헤너시는 이 땅을 소유하려고 혈안이 된 상태. 앙숙 관계인 두 목장주는 줄리의 땅을 사들여 상대방 집안의 말이 강을 이용하지 못하게 보복하려는 속셈이다. 이러한 그들의 의도를 간파한 평화주의자 맥케이는 줄리에게서 땅을 사들여 두 집안이 모두 강을 사용하게 하려는 전략을 취한다.

며칠 동안 사라진 맥케이를 찾으려 나선 테릴의 심복 스티브 리치(찰톤 헤스톤)는 잔뜩 화가 나서 맥케이를 몰아세운다. 스티브는 겁장이 같은 맥케이의 태도도 마음에 안들지만 자신이 흠모하고 있던 패트리샤의 약혼자라는 점도 못마땅하다. 맥케이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용기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모두가 잠 든 밤에 스티브의 숙소에 찾아온다. 이제부터 이 장면들에 집중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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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스름한 밤 하늘을 배경으로 무언가를 한참 고민하는 맥케이. 그의 시선과 같은 방향으로 스티브 리치의 숙소가 보인다. 맥케이는 이제 싸워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실내 장면. 그레고리 펙과 찰톤 헤스톤이라는 당대 최고의 배우가 마주 보고 서있는 모습만으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날 것처럼 보인다. 빅맨끼리의 빅게임이 일어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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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케이는 숙소에서 먼저 나와 스티브 리치가 옷을 입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이 장면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데 가옥의 구조가 만들어내는 프레임이 영화 속 영화의 스크린처럼 보인다.

두 명의 거인이 싸움터로 걸어가는 장면을 영화 속 풍경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처럼 연출하고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시간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결투지만, 이 싸움은 이 영화 전체 중 가장 중요한 장면이기에 와일러가 고민한 흔적이 돋보인다. 아무도 보지 못하지만 두 사람(과 관객)만 알게되는 신화적 싸움의 시작을 이렇게 스크린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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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꾸이에서 온 소년>(1983)에서 영화의 스크린처럼 보이는 대도시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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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개론>(2012)의 서연의 집과 제주 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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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터렐의 작품들 


창을 보여주는 장면이 인상적인 영화들은 많지만 내 기억 속에 먼저 떠오른 것은 허우 시우오시엔의 <펑꾸이에서 온 소년>과 이용주의 <건축학 개론>이다. <펑꾸이에서 온 소년>에서 소년들은 포르노 영화를 보기 위해 건달에게 돈을 건내고 아직 완공이 안된 건물 위로 올라간다. 거기에 가면 TV와 비디오 시설이 갖추어져서 원하는 도색 영화를 실컷 볼 수 있다는 말을 믿고서. 장소에 도착한 뒤 그들은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 거기에 대도시의 풍경이 들어오고 소년 중 누군가 말한다. '영화가 있긴 있네'. 미완공 건물의 프레임이 보여주는 현실이라는 풍경이 영화처럼 펼쳐지는 장면이다. <건축학 개론>에서는 서연의 집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프레임을 스크린처럼 사용했다. 폴딩 도어를 열면 눈 앞에 펼쳐지는 바다가 마치 주인공 남녀의 못다한 감정을 실어올 것 같다. 


<펑꾸이에서 온 소년>과 <건축학 개론>은 프레임을 이용해 풍경이 들어오는데 것이라면, <거대한 서부>는 거대한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것에서 프레임의 활용이 다르다. 굳이 유사한 것을 찾는다면, 올 여름 휴가 기간 중에 원주 뮤지엄 산에서 본 제임스 터렐의 시각 예술 작품에서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 관객이 작품을 관람하다가 작품 속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황홀한 시각적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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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두 명의 거물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간 순간 이어지는 장면에 대한 윌리엄 와일러의 연출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간간히 미디엄 숏이 나오긴 하지만 대부분의 장면에서 두 사람의 싸움을 카메라는 한없이 멀리서 잡고 있기 때문이다. 테크니 컬러와 테크니라마로 찍었지만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의 결투는 <벤허>의 결투 씬과는 상반된 것이다. 이 장면에서 윌리엄 와일러가 보여주는 것은 자연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초라함이다. 두 남자가 피를 흘리며 주먹다짐을 하지만 롱 숏으로 찍은 이 장면에서 어떤 음악적 요소도 배제되고 그저 들리는 것은 풀벌레가 우는 소리다. 자존심을 건 두 남자의 싸움을 광활한 달빛 아래 곤충들의 다툼으로 격하시켜버리는 연출의 대담함.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은 제목과 같은 '거대한 서부'의 풍경. 그 풍경 앞에 대조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옹졸함. 최고 배우 두 사람을 이런 식으로 소모하는 방식이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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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타닉>(1997)에서 망망대해에 떠있는 타이타닉호

영화 평론가 정성일은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에 아무런 감흥을 못 느끼다가 딱 한 장면에서 눈이 번쩍 뜨이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장면이란 영화 내내 그렇게 엄청나 보이던 배가 망망대해의 밤바다에서 초라하게 보이도록 찍은 부감 쇼트를 말하는데 정성일 평론가의 말로는 거대한 배가 갑자기 초라해지는 이 장면을 위해서 제임스 카메론이 <타이타닉>을 만든 것 같다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정성일의 이런 평이 우습다고 생각한다. 언급한 쇼트는 <타이타닉>에서 아주 짧게 보여지는 인서트 쇼트에 불과하기에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오히려 정성일 평론가가 느꼈던 그런 감흥은 <거대한 서부>의 결투 씬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2시간 46분의 러닝 타임을 가진 이 영화가 내내 지루하다가 1시간 33분 지점에 도달했을 때 보여주는 저 장면은 경이롭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윌리엄 와일러가 친 멋진 홈런과 같은 장면이다. 우리가 잊지말아야 할 것은 메이저리그 9번 타자도 가끔 입이 딱 벌어질 만큼 큰 홈런을 날린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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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Comments
2 TravisTyree  
와일러에 대한 평가와 해당 작품에 대한 평가에 전반적으로 공감합니다. 영화의 스케일이 커서 러닝타임이 길어진 것이 아니라, 그만한 스케일이 아닌 작품을 억지로 에픽무비처럼 3시간 분량으로 늘렸다는 느낌이 강하게 받았어요. 펙이 연기한 주인공도 양비론에 찌든데다 자기와 다른 삶을 산 이들의 사고를 전혀 이해 못하는, 관객으로서 하나도 공감 안 가는 캐릭터라서 전혀 맘에 안 들었고, 그 캐릭터가 대변하는 주제의식도 그랬고요.

그래도 저는 제가 좋아하는 배우인 벌 아이브스의 연기, 그리고 말씀하신 장면에 더해 좋았던 몇몇 장면 때문에 이 영화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아이브스가 첫 등장하는 장면의 일장연설, 찰턴 헤스턴이 캐롤 베이커에게 강제로 키스하는 장면에서 나온 두 배우의 연기, 그리고 영화 후반부 헤스턴과 카우핸드들이 고집스럽게 홀로 사지로 들어간 찰스 빅포드를 뒤쫓아가는 장면이라던가...영화 전체적으로 보면 단점투성이인데도 배우의 연기 같은 부분적 요소나 간혹 나오는 몇몇 장면들이 워낙 좋아서 호감을 거두기 어려운 영화들이 가끔 있는데, 이 영화가 저에게는 그런 작품들 중 하나였네요.

바쟁이 리얼리즘 이론을 주창하면서 웰즈와 와일러를 한 세트로 묶어서 찬양하고, 반면 존 포드는 그에 대한 대척점으로 보고 꽤나 짜게 평가했는데, 정작 그 당사자인 웰즈가 포드는 그렇게 좋아했던 반면 와일러는 대놓고 저평가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꽤나 무안해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12 블랙헐  
글 앞에 미리 사과를 하시어 당혹했네요~ 좋은 평 보고 갑니다~~~
13 쪼으니까  
설명이 대단하시네요
이런글은 해박한 지식이 아니면 엄두도 못 낼 건데...
존경 스럽네요
사진 첨부가 안됐다면 조금은 난해했을 텐데 이해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S 토마스모어  
윌리암 와일러에 대한 평가와 생각은 저와 180도 반대지만,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거의 일치합니다.

저는 아마 앙드레 바쟁보다 더 강력한 윌리암 와일러 감독 지지자일 겁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 '작가'랍시고 설쳐대는 감독과 달리 철저히 'Drectied by'의 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빌리 와일더는 최고의 감독일까요? 최고의 작가일까요? 자신이 각본을 쓴 영화를 만드는게 아무래도 유리하지요. 하지만 윌리암 와일러처럼 철저히 '난 감독일 뿐이다'라는 선을 넘지 않고 그 포지션에서 최고의 실력을 보여준 인물은 없을 겁니다. 당연히 오손 웰즈 같은 작가 감독에게는 우습고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오너' 사업가만 대단한 인물이 아니듯, '전문경영인'도 재평가 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물론 윌리암 와일러는 초장기 작품이 더 뛰어나지만 말씀하신 목록중 '이 세 사람' 같은 작품이 빠져 있는 건 서운하네요.  보고 정말 감탄한 작품인데.

제가 장담하건데 벤허 도 여러번 보시면 아마 빅 컨츄리처럼 우와 하는 뭔가를 발견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전차경주' 장면은 이미 1925년 무성영화에서 보여준 장면의 답습이라서 생각보다 높게 평가하진 않아요.  다른 점이라면 찰톤 헤스톤과 스티븐 보이드의 존재감이 좀 더 빛을 발한 것일 뿐.  벤허의 진짜 묘미는 윌리암 와일러가 스티븐 보이드에게는 동성애적 설정을 알려주고 찰톤 헤스톤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상태로 연기를 시켰다는거죠. 벤허와 멧살라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런 점을 염두에 두면 상당히 재미납니다.  일종의 찰톤 헤스톤 몰래 카메라 같은 느낌이.

빅 컨츄리는 제가 참 좋아하면서 참 싫어하는 영화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지요. 영화보다는 음악을 훨씬 먼저 알았고, 음악이 너무 뛰어나서 기대했던 작품인데 제가 참 좋아하는 찰톤 헤스톤이 거의 하찮은 조연이라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둘이 싸우는 장면에서 찰톤 헤스톤이 그레고리 펙을 좀 흠씬 패주기를 바랬는데 오히려 얻어텨져서 더 실망했고.  어린 마음에 그런 단순함에 실망하기도 하지요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건데.  이건 자이언트에서 록 허드슨이 얄미운 제임스 딘을 좀 패주길 바랬는데 패진 않고 애꿎은 술병들만 왕창 부셔서 실망했던 것과 마찬가지였죠.

윌리암 와일러는 절대 우습게 볼 감독이 아닌게 아주 하찮은 장면에서 세심한 디테일이 있습니다. 위의 장면에서 묘사를 안했지만 저희 어머니는 이 영화에서 둘이 싸우기 전 찰톤 헤스톤이 바지를 치켜 입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했거든요.  저도 그 장면을 유심히 봤는데 딱 1초 정도 되는 장면이지만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바지를 강하게 위로 당겨 입는 그 장면이 특별해 보였죠.  '오냐 때가 왔다, 혼내주겠다'라는 결기와 즐거움이 그 1초 장면에서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그가 50-60년대 만든 영화와 30년대 명작 각색물을 굳이 동등비교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영화를 만들때는 만들고자 하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에 집중하는게 중요한거죠. 대작은 대작에 맞는 목표, 서부극은 서부극에 맞는 목표, 흑백명작은 그 수준에 맞는 목표. 윌리암 와일러는 그런 역할에 굉장히 잘 충실한 장인이라고 봅니다. 작가가 아닌 장인이라고 해서 그의 주옥같은 후기작이 무시당할 일은 없죠. 우리는 수많은 추앙받던 감독이 유명해지면서 대작에 도전했다가 참담한 실패를 하는 경우를 참 많이 봤습니다. 그걸 무난히 극복해낸 보기 드문 감독이 윌리암 와일러라고 보고, 심지어 그의 실패작에서 조차 건질 부분이 상당히 많았으니까요. 작가주의 감독이 존재하고 장르의 장인이 존재하지만 꼭 감독이 그런 길을 걸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충실한 고용 감독으로서의 최고의 역할을 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이라고 생각해요. 이부분은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연출이라는 영역 하나만 봤을 때 윌리암 와일러 만한 디테일을 가진 인물은 드물다고 보니까요.  '벤허'가 지루한 종교영화가 된 건 윌리암 와일러의 잘못이 아니라 원작과 시나리오의 문제일 뿐. 오히려 그런 작품을 그 정도 재미난 영화로 만든건 오로지 윌리암 와일러의 능력이라고 보여지죠..

올려주진 두 사람이 뒤돌아서 있는 광활한 장면 '빅 컨츄리'라는 제목이 정말 딱 걸맞는, 저 장면 하나로 끝났네요.  이런 작품을 극장에서 본다는 건 굉장히 행복한 일이라고 봅니다. 저는 최초에 볼 때 4:3 TV에서 봤는데 가뜩이나 별로 안 나오는 찰톤 헤스톤이 찰스 빅포드와 말을 타고 가는 장면에서 옆에 서는 바람에 짤려서 짜증이 났습니다.  4:3 으로 보다가 원 비율로 보는 것, 원 비율로 모니터로 보다가 스크린으로 보는 것은 정말 확연히 다르지요. 빅 컨츄리에 대한 진가를 가장 잘 느끼셨을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서부 영화 음악중 가장 좋아하는 두 편이 '황야의 7인'과 '빅 컨츄리' 두 편의 테마입니다.

이 영화 후일담으로 찰톤 헤스톤은 50년대 초반부터 이미 주연만 한 배우였는데 캐스팅 제의가 왔을 때 주인공도 아니고 네 번째 비중 정도 되어 고민했는데 주변에 상의를 하다가 윌리암 와일러의 영화라면 단역이라도 출연해야 한다는 권유를 듣고 출연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결과론적으로 잘한 거죠. 그 덕에 벤허에 출연했으니. 

빅 컨츄리 개봉때 우리나라에서는 찰톤 헤스톤의 인기가 더 높아서 그레고리 펙이 완전 주인공인데 신문광고에는 찰톤 헤스톤 이름이 더 앞에 나왔습니다. 사진도 그의 얼굴을 중앙에 배치했고.

찰톤 헤스톤과 그레고리 펙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데 뭘까요? 답은 찰톤 헤스톤은 어떤 영화에 출연해도 쓸데없이 상의를 벗고 상반신을 드러내는 장면이 거의 나오는데 그레고리 펙은 오히려 상의를 벗어야 하는 장면에서도 어지간해서는 상의를 안 벗는다는 점이죠. '다윗과 바세바'같은 시대극에서도 상의를 꼭꼭 껴입고 나왔고 '슛아웃'에서는 물에 들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옷을 입고 들어갔고 그나마 유일하게 딱 한 번 상의를 벗은 장면이 '백주의 결투'인데 1-2초 정도만 반짝 나왔습니다.  뭔가 상반신 컴플렉스가 있는 배우 같습니다.  찰톤 헤스톤의 벗은 상반신 안나오는 영화 찾는거와 그레고리 펙 상반신 벗는 영화 찾는 것의 난이도가 비슷할 겁니다.

이런 글에는 굳이 답글을 쓸 필요성을 느끼지 않지만 그래도 몇가지 초점이 안맞기에 글을 씁니다.

1. 일단 제가 말하는 작가는 개성이 있는 감독입니다. 님이 말하는 설쳐대는 감독과 다르고요. 와일러는 설치는 감독은 아닐지라도 개성은 없는 감독이지요. 스튜디오 시스템 체제에 맞추어서 만드는 감독. 그걸 님은 우수하게 평가하지만 저는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마저 높게 평가한다면 개성이 있는 감독의 개성을 평가하기 힘드니까요.

2. <벤허>도 여러 번 보면 <거대한 서부>처럼 뭔가를 발견할 것이라는 말은 잘못 짚은 말입니다. 여러 번 봤고(아마 님보다 더 많이 봤을 수도 있습니다), <벤허>에서 좋은 장면을 말하라고 하면 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여러 번보면 당연히 좋은 장면을 찾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대한 서부>가 본문에 소개한 것처럼 흥미로운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냥 평범한 영화라는게 제 글의 요지입니다. 그래서 메이저리그 9번 타자 예를 든 것이고요.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피아니스트가 특정 소절에 연주가 훌륭하다고 그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훌륭하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3. 어떤 감독 이야기를 할 때 왜 이 영화는 빼고 말 하느냐라고하면 난감합니다. 당연히 <이 세 사람>을 봤죠. 저는 그 영화에 대한 감흥은 <아이들의 시간>과 비교할 때, 흥미로웠습니다. 굳이 본문에 언급할 필요는 못 느끼겠습니다.

제가 윌리엄 와일러를 옹호하라마라할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기에 이쯤에서 글을 줄이겠습니다. 하지만 와일러보다 훨씬 좋은 감독들이 많으며 그들이야말로 재평가 되어야 한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아무튼 긴 댓글은 감사합니다.
S 토마스모어  
네, 답글 감사합니다. 사실 각자와 다른 관점이고 그게 영화니 굳이 답글을 필요없는데 성의있는 답글 감사드립니다.

저도 조금만 부연하면 윌리암 와일러에 대해서 평가절하하는 많은 분들의 견해가 작가감독이 아니라는 점 때문인 경우를 살면서 많이 접해서 그 점에 대해서 부연한 것이고 꼭 님의 생각을 짚은 것 아닙니다. 하스미 님이 윌리암 와일러에 대해서 저평가하는 개인의 견해는 충분히 존중합니다. 이유가 분명한 생각은 전혀 트집들 잡을 필요가 없지요. 영화가 수학공식처럼 답이 정해진 건 아니기 때문에.

이 세 사람은 왜 그 영화를 뺏냐고 뭐라한게 절대 아니고 저는 그 영화를 다른 윌리암 와일러 영화 보다 더 높게 평가한다는 걸 그런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님이 다른 영화를 더 평가하고 이 영화는 누락시킨 건 전혀 문제삼을 부분이 아니죠. 문제삼은게 아니라 저의 견해를 피력한 것 뿐입니다.

저는 영화관이 전혀 다르거나 선호도가 전혀 다른 분들의 글에서도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고 그런 경우 반가운 마음으로 글을 남기곤 합니다. 그건 그 글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느냐 부분 동의하느냐, 전혀 동의못하느냐와는 별개의 부분이지요.  저의 댓글을 글 쓰신 분을 향해서만이 아닌 글을 읽는 불특정 다수와 공유하는 글이고 여러 의견을 다양하게 공유하자는 의미에서 쓰는 것일 뿐, 한 영화에 대해서 주장의 피력한 어떤 사람에 대해서 반론을 피력하고자 하는 경우는 당연히 아닙니다.  다른 의견과 반론은 전혀 다른 문제죠.

저는 윌리암 와일러 급 정도 된다면 누가 더 좋은 감독이나 마냐 라는 개념은 크게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벤허'와 '시민 케인' 어느 영화가 더 위대하냐는 답을 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민케인'과 '애마부인' 중 어느 영화가 더 우수하냐는 수학공식처럼 답이 정해졌다고 생각하거든요.

윌리암 와일러와 빌리 와일더 중 누가 더 위대하냐 이건 견해나 관점에 따라 다르다고 봅니다.
하지만 빌리 와일더와 남기남 중 누가 더 위대한 감독이냐 이건 견해나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수준의 차이라고 생각하지요.

말이 나온 김에 좀 더 부연하면 저는 '벤허'와 '작은 여우들' 혹은 '우리생애 최고의 해'를 어느 영화가 더 나으냐고 비교하는 것 자체를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벤허와 십계, 왕중왕, 엘시드 중 어느 영화가 나으냐 이런 비교는 비교적 공정할 수 있는데.

체급이 다르고 포지션이 다르고 목적이 다르고 장르가 다르고 요구사항이 다른 영화를 막연하게 동등비교하긴 어렵다고 보거든요.
아우디 승용차와 고급 오토바이 중 어느 것이 나으냐 라는 비교와 마찬가지라고 봐요.

윌리암 와일러가 벤허를 만들던 시기에는 이미 작은 여우들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도 만들기 어려운 시기였다고 생각하고 위상, 개런티, 포지션이 이미 달라졌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는 십계를 능가하는 거대한 상업영화 대작을 만들어야 하는 포지션에 섰고 그걸 충실히 잘 지켜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메이저리그 9번타자가 아니라 올라운드 플레이어지만 타이틀 수상을 하나도 못한 만능 플레이어라고 비교하는게 합당하다는 생각입니다. 개성있는 감독이 좋으냐 다방면에 다 능통한 감독이 좋으냐는 선호도와 관점의 차이일 뿐.  '벤허'라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감독을 고용했을 때 과연 윌리암 와일러보다 더 나은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감독이 누가 있을까 라는 질문에 저는 '거의 찾기 힘들거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포지션에서 그런 요구사항과 목적을 그렇게 합당하게 달성해주는 연출가가 과연 얼마나 될까 라는 생각입니다. 

윌리암 와일러는 사실 좀 비판받아도 되는 감독이긴 해요.  과하게 평가받은 부분이 좀 많으니 하스미님처럼 평가절하하는 사람도 가끔 나타나 줘야 균형이 맞죠.  제가 어릴 때 학생백과사전 예능 편에 영화감독으로 실린 인물이 채플린과 윌리암 와일러 딱 두 명 뿐이었고, 레너드 말틴의 별점평가에서 별 네개 만점이 가장 많았던 인물이 1위가 히치콕, 2위가 윌리암 와일러 였는데 장단점이 있는 감독인 만큼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의견도 사실 흥미롭거든요.  마치 '빅 컨츄리'에서 동부에서 온 신사 그레고리 펙을 아주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찰톤 헤스톤의 좋은 연기처럼요.  저처럼 극찬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공평치 못하잖아요.

아무튼 빅컨츄리에 대한 디테일한 글 재미있게 읽었고, 제 기준에서는 그 정도 분량은 긴 글이 아닙니다.
제가 글을 무뚝뚝하게 쓴 것 같아서 사과드립니다. 사실 다른 분이 아니라 토마스 모어님의 글이래서 더 짜증이 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런거죠. '선수들끼리 왜 이러시나?' 알만큼 아시는 분인데다 저보다 더 많이 아시는 분한테 구질구질 설명하는 것도 뭐해서요.

굳이 제 입장을 말씀 드린다면, 앙드레 바쟁이 <벤허>를 안보고 죽은 것이 행운이라고 한 것은 무턱대고 한 말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맥락이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윌리엄 와일러를 무개성의 감독이라고 비판을 합니다. 개성이 있는 감독과 무개성의 감독은 어떻게 다르냐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자기만의 스타일, 즉 흔히 말하는 '저자의 서명'이 드러나는 감독을 개성이 있는 감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회화 작품을 보면, 이건 고흐 그림이네, 이건 누가봐도 피카소 스타일이구만, 딱 봐도 잭슨 폴락이네 이렇게 작가의 스타일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무개성의 작가는 그냥 주문한대로 작품을 만듭니다. 자신의 스타일보다는 주문자가 원하는 작품을 만드는데 더 치중합니다. 오손 웰즈가 와일러를 '좋은 프로듀서'라고 한데에는 그런 까닭이 있는 것이지요. 앙드레 바쟁은 와일러를 '스타일 없는 스타일'이라고 궁색한 변호를 합니다. 눈에 드러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편집이나 카메라 움직임이 이 감독의 서명이라면 서명이라 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다만, 여기에는 어떤 전제가 있습니다. 바쟁이 와일러를 변호한 것은 와일러가 자주 사용하는 딥 포커스와 롱 테이크 기법이 바쟁의 영화 리얼리즘 이론에 맞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바쟁은 와일러가 관객이 심도 초점 화면과 연속된 화면을 통해 스크린을 관찰하고 선택하고, 자신의 의견을 형성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바쟁은 와일러를 중립적이고 민주적인 시선을 가진 감독으로 치켜세웁니다. <작은 여우들>과 <우리 생애 최고의 해> 같은 영화를 분석하며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가지요.

하지만 <벤허> 단계에 오면 그런 민주적 시선이 어쩌구 저쩌구 할 필요가 사라집니다. 그냥 제작자가 요구하는대로 영화를 만드는 장인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바쟁이 <벤허>를 안보고 세상을 뜬게 운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바쟁이 그 영화를 봤다면 와일러를 변호하던 자신의 관점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후회했을 것입니다.

영화를 예술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고 엔터테이먼트의 관점에서도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고지식한 것인지 '영화가 다른 무엇이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영화를 보면서 형성된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저랑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윌리엄 와일러를 좋아한다면 그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싫어하는 이유가 있듯이요. 저는 작품을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것은 제 나름의 고집이자 관점이지요. 하지만 내가 싫어하는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편협하게 바라보지 않을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작품과 무관한 것이니까요.
이야기가 주저리 주저리 길어졌습니다. 혹시라도 답글이 무례했더라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주시길 바랍니다.
S 토마스모어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결국 같은 말을 하는거잖아요. 가령 제가 와일러를 뛰어난 작가주의 감독이라고 했다거나 하스미 님이 와일러는 형편없는 프로듀서 라고 했다거나 그랬다면 분명 지적하고 바로 잡아야 할 부분 일 뿐, 서로 같이 느끼고 인정하였지만 선호하는 부분이 다를 뿐일걸요. 너무 예민하게 (댓글 쓰시면서 에휴 하는 한숨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쓰신 것 같아서 제가 오해도 풀어드릴 겸 부연을 길게 한 겁니다. 저는 가급적 따뜻하고 관대한 시선으로 영화를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위대한 감독에 대해서는 상당한 존중과 극찬을 하고요. 윌리암 와일러는 가장 뛰어난 '주문형 제작' '맞춤형 제작'이 가능한 감독이었지만 그런 지위를 위해서 개성을 스스로 포기했다고 생각해요. 그건 개성에 대한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재능을 그 방향으로 쏟은 것일 뿐이죠. 그래도 아쉽지는 않은 건 30-40년대에 그렇게 후덜덜한 영화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후의 영화들에 대해서도 저는 또 다른 세계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분석도 좋아하지마 잡설도 좋아합니다. 그래서 별 무의미한 영화 외적인 잡설도 구구절절 늘어놓을 뿐이에요. 너무 살벌하게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요.  그래서 좋아하는 배우 찰톤 헤스톤이 그레고리 펙을 실컷 두들켜 패지 못해서 영화보고 분해하던 철부지 시절의 시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건 제 견해일 뿐, 살벌하게 영화보는 분들이 있어서 영화가 더 발전하는 것이겠죠.  63년이나 지난 고루한 서부극 '빅 컨츄리'에 대해서 과연 이시대에 누구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습니까?
13 쪼으니까  

우와!
대단하신 문장 실력들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존경스럽습니다
17 달새울음  
그래서 하스미님의 글에는 쉽게 댓글을 못달아요.
13 쪼으니까  
"하스미시계있고"님!
남다르시고 존경 받을만 하네요
4 gameDev  
논지랑 상관없지만 james turrell 이라는 예술가를 알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