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리카투

영화감상평

잘리카투

1 마멜 0 556 0

 좋은 영화는 내용보다 형식으로 말합니다. 저는 잘리카투가 단순한 내용을 어떤 형식으로 말하는지에 관해서 써보고자 합니다. 

 

 영화의 서사는 간단하게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도주한 소를 잡는 과정에서 각각의 개성을 가진 개인들이 하나의 군중-덩어리가 되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재밌는 것은 감독이 이 과정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도입부에서 관객들은 독특한 타악기의 소리와 함께 한 마을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타악기의 타격음에 대응하는 하나의 테이크를 연속적으로 보여주면서 리듬을 부여합니다. 감독은 짧은 리듬을 점진적으로 확장시키면서 마을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노출하는데 그 연출 덕에 관객들은 그 마을의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자며, 어떤 일을 하는지 대략적인 스케치를 얻게 됩니다. 

 

 감독은 대략적인 스케치를 제시 한 후에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도축되어야 할 소가 도망쳤고, 마을 사람들은 소를 잡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목표가 정해진 순간, 감독은 초반의 연출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연출하기 시작합니다. 초반 10분의 연출이 뮤직비디오 같았다면 중반부의 연출은 공포영화의 연출 방식을 비튼 것처럼 보입니다. 관객들이 공포영화를 볼 때 공포감을 느끼는 이유는 위협적인 대상이 프레임 밖에 있으면서도 외화면 안에 있다는 사실을 항상 주지시키기 때문입니다. 즉, 카메라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어떤 신호를 통해 영화 속 캐릭터들과 같은 공간에 있으며 언제든 그들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 째로 카메라는 위협적인 대상을 찍지 않는다는 것. 프레임 안에 괴수나 귀신 등이 나오지 않는다면 카메라는 결국 등장인물들에게 집중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잘리카투도 마찬가지로 도망친 소에 집중하는 대신 소를 쫒는 인물들에게 집중합니다. 소는 프레임 밖에서 주기적으로 돌아다니며 마을 주민들이 움직일 원동력을 만들어주는 동시에 사람들의 갈등이 분출되는 원인이 됩니다. 감독의 위와 같은 연출 방식 덕분에 관객들은 쿠타찬이 왜 마을에서 추방되었는지, 왜 안토니가 그토록 소를 잡는데 혈안이 되었는지 영화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로 지속적으로 신호를 보낸다는 것. 소가 도망치면서 내는 소리는 갈등하던 사람들을 다시 모아주는 구심점이 됩니다. 이것은 마치 서로 대립하던 등장인물들이 괴수를 보고 같은 방향으로 도망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갈등하는 와중에서 소의 울음소리, 숲을 헤치며 달리는 소리가 들리면 즉시 하나가 되어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이런 반목과 합치는 진자운동처럼 주기적으로 일어납니다. 이 과정들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감독이 사운드를 활용하는 방식 덕분입니다.

 

 마지막으로 감독은 한번 더 연출 방식을 바꾸는 시도를 합니다. 그것이 극대화되는 장면이 바로 우물 시퀀스입니다. 많은 관객들이 우물에서 소를 놓치는 장면에서 개연성이 파괴되었다고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독이 서스펜스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설명하자면 탈출한 소를 잡는 행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소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군중들의 갈등과 그것이 어떻게 발화되는가에 대해 더 방점이 찍혀 있기 위해서 소는 맥거핀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극을 이끌어왔던 소가 맥거핀이 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풀려나고, 인물들의 초점으로부터 멀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어떤 계시에 의해 풀려난 것처럼 보이던 소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왜소한 노인처럼 힘없고 무기력해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첨예한 갈등으로 대립하던 개인들은 소를 잡기 위해서 -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 맹목적인 덩어리처럼 변모합니다. 초반에 각각의 개성을 보이며 뚜렷한 구별점을 가지고 있던 개인들이 마치 화가의 붓에 의해 뭉개진 것처럼 하나의 색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담은 마지막 시퀀스는 시각적으로 충격을 주기 충분합니다. 

 

 영화의 첫 쇼트들의 연속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영화 초반에 타악기 소리에 맞춰서 화면에 나타나는 것은 마음 사람들의 눈입니다. 눈은 하나의 우주라고 하죠. 반면에 마지막 시퀀스에서 진흙으로 엉망이 된 사람들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보여질 때는 그 어떤 개별성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잘리카투는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영화입니다. 그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든 같은 의견이 나오기도 힘들 정도로 다양성을 품고 있는 영화입니다. 익숙한 연출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오독해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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