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매> -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장윤주의 연기가 보고 싶어 극장을 찾았다. 2시간 동안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고 싶다면 <세자매>를 보면 된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개미지옥이, 과거의 상처가 현재와 미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의 거지 같은 삶이 그 안에 있다. 그래도 이승원 감독은 누더기가 될 때까지 찢어발기지는 못/안 했다. 인물들 감정을 더 누르고 좀 더 뾰족하게 갈았어야 했다. 그 덕분에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구원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나도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족과 가정 폭력이 출구 없는 구덩이라는 것만 확인했을 뿐, 가정과 집이 얼마든지 지옥이 될 수 있고 그 멍에가 세대를 넘어 인간의 내면을 망가뜨리는 굴레로 덧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 그 사실적 민낯도 성과라면 성과일 수 있겠다. 시간이 지나 육신의 멍은 사라졌지만 아이들은 피멍이 든 마음을 안고 자라 부모가 됐고, 부모라는 또 다른 죄인(부모에게 당한 피해자이자 자식에겐 가해자)이 되어 죄지은 제 아비를 단죄하지 못한다. 죄가 시작되기 전으로 되돌릴 순 없지만 다시 시작할 수는 있다. 엄마가 되고 싶지만 엄마가 되는 법을 몰라 길을 잃었던 미옥(장윤주)의 변화가 작은 희망을 보여준다. 보살핌을 받지 못한 어린 새는 알을 품어 새끼를 낳고 기를 수 없다. 기억의 상처는 날개마저 꺾어버린다. 상처 입은 아이들은 자라 너무 열심히 살거나 열심히 사는 걸 포기하는 어른이 된다. 그래도 가짜 엄마는 진짜 엄마 행세를 하려고 몸부림친다. 술을 마시고 의붓아들의 학교 상담에 찾아가 '나도 엄마'라며 쌍욕을 내뱉는 장윤주의 연기를 볼 때, 잠시 뜨거운 것이 치받아 올라왔다. 가짜 엄마는 그렇게 진짜 엄마가 되려고 한다.
방관자(남편의 폭력을 방치한 친엄마, 가정 폭력을 피해 도망 친 자매에게 아버지한테 돌아가 '잘못했어요'하고 빌라며 혼내는 동네 아저씨들)에 대한 고발은 서늘했다. 폭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명확한 지적. 폭력 앞에 꺾인 첫째 딸 희숙(김선영)은 부당한 남편과 자식에게 화를 낼 줄 모르는 어른으로 자란다. 자기 정체와 의지가 사라진 자리에 순종과 포기와 자기 비하(자해)가 자리 잡는다. 아비의 폭력을 학습해 내재화 한 둘째 미연(문소리)의 감정을 억누른 얼굴에선 종종 아버지의 폭력성이 번득인다. 세자매는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망치고 있다. 고삐 풀린 장윤주와 희번덕거리는 광기를 억누르고 있는 김선영 사이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문소리의 균형을 잡는 연기가 소름 돋았다. 눌렸던 감정들이 영화 막바지에 신파조로 휘몰아칠 때, 쌍욕을 하고 악을 쓰는 캐릭터(특히 첫째 희숙의 딸 보미)와 상황 설정(아버지 생일 잔칫상에서 오줌을 갈기는 아들)이 막장 드라마처럼 비현실적이게 튀어서 '사실적 가족영화'란 평가가 무색해지는 점은 아쉽다. 감정의 폭발 속에 서둘러 봉합(진짜 화해라 보긴 어렵지 않을까?)된 마지막 장면 역시 아쉽지만, 뻔한 장르 영화의 법칙에 기대지 않고 사실적 가족 관계를 그린 영화의 완성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바탕 살풀이춤을 춘 것 같은 세 배우(김선영, 문소리, 장윤주) , 아니, 우리 주위에 실재로 존재할 것 같은 캐릭터를 창조한 다섯 배우(상춘 역 현봉식, 보미 역 김가희)의 연기 합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다. 장윤주라는 배우의 탄생과 김선영의 재발견만으로도 의미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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