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to (1965)

영화감상평

Salto (1965)

13 리시츠키 2 85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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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rector: Tadeusz Konwicki
Writer: Tadeusz Konwicki

나치가 물러가니 스탈린이 오듯, 전체주의 체제 속 전쟁의 후유증은 치유되지 않는다. 영화는 정신병을 앓고있는 집단의 무의식을 마치 부조리극처럼 묘사한다.

전쟁을 겪은 성인남성들은 모두, 기억상실증이거나 술주정뱅이이거나 귀가 멀었거나 허풍쟁이이거나 이유없이 남을 미워하거나 누군가로부터 숨어다니는 인물들이다.


온 나라를 떠돌며 전쟁의 트라우마를 겪는 주인공이 겨우 고향을 찾아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 내리지만(JUMP), 그가 간절히 바라던 과거의 평화로왔던 고향의 모습은 그림속에나 있을뿐이다.

절뚝거리며 개울가를 건너던 그는 나체로 목욕을 하는 두 여인을 우연찮게 보게되는데, 이는 과거와 현실을, 일상과 정신병적 증상을 가르는 경계가 된다.

짧은 쇼트로 보여지는 실재, 개울가의 두 여인은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이유는 그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결말에서 다시 고향으로부터 도망쳐 다시 달리는 기차에 뛰어 오르지만(JUMP), 바로 그 실재 때문에, 그는 다시 기차에 오르/내리기를 반복할것이다.

악몽은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다. 밤낮없이 끊이지않는 공장과 탄광의 망치질 소리처럼. 매년 찾아오는 오토바이 3대의 요란한 소리처럼.

영화는 고향 마을에서의 주인공의 이박삼일을, 그의 자조적인 횡설수설과 죄의식을 따라간다. 감독은, 전쟁의 후유증을 겪는 그의 심리와 행동을 허리우드식의 서사구조와 주제 대신

별다른 극적 서사 없는 에피소드들의 느슨한 이야기로 대체하고, 고전적 편집과 연출 대신 가시적 편집과 롱테이크로서 그의 정신병적 증후들을 드러낸다

예를 들면, 그가 한밤중에 악몽으로 잠에서 깨고 방안을 어슬렁거리다 카메라 정면을 보자, 갑작스럽게 오후/집 앞 정원으로 시간을 툭 끊어서 씬을 붙여버린다.

설정샷도 없다. 한 여인이 이미 카메라 중경에서 전경으로 걸어오고 있다. 외화면으로 주인공이 "마리아" 그녀를 부르지만, 독자는 그가 이 곳에 언제 왔는지도 알 수 없고,

더구나 그녀의 대답은 서사마저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다 "저는 마리아의 딸 헬레나"라고.

숲에서 폭탄이 터지고, 마을사람들과 논쟁을 하다가, 반응샷도 생략하고, 다시 헬레나가 풀에 누워있는 미디엄샷으로 바로 씬을 시작한다.

설정샷은 당연히 없고 풀 숲 어딘가로 짐작할뿐이다. 헬레나의 프레이밍 밖에서 그가 대사를 말하지만, 그의 보이스 오버인지 그가 이곳에 이미 언제 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녀가 일어나자 역샷으로 그의 모습을 싱클컷으로 커팅되고 그를 따라 카메라가 붐다운하면 그녀와의 투샷이 만들어지고, 다시 그와 그녀의 롱테이크를 만들어낸다.

또한 사이즈가 안맞는 클로즈업샷이 샷과 샷 사이에 삽입되고, 샷/역샷의 반응샷의 시선은 상대가 아니라, 프레임밖 독자를 향하며 대사를 종종 한다.

또한 샷과 샷 사이의 행동이나 과정의 묘사는 연속편집되지 않고, 의도적으로 충돌한다. 아이를 구하러 간 그의 샷 다음에, 술취한사내가 여자를 히롱하는 장면을 컷어웨이 되면,

다음샷에서는 그가 이미 아이를 치료하고 함께 서있는 샷이 붙는다.

숲에서 마을 도로에 오토바이 세 대가 지나가는걸 보다가, 갑자기 군인 세 명이 그에게 다가와 총을 겨누는 숏이 붙더니, 다시 그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깨어난다.

이처럼 시공간의 의도적인 불일치를 편집하고 연출한 감독은, 그 이유를 극중인물의 입을 빌려 추상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불빛 보여요? 공장과 광산이 저기 있어요. 우리쪽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 마을은 이미 모든 지도에서 지워졌어요. 더는 존재하지 않아요" 

스탈린 시기의 폴란드의 밤이 이렇게 찾아오고, 그는 마을 회관의 기념식에 참석한다. 영화에서 가장 긴 시퀀스인 이 장면은 어떤 면에서는 마치 펠리니의 <8 1/2>을 연상시키는데,

차이라면, 펠라니가 자기도취의 분별없는 긍정으로 영화를 마무리 지었다면, 콘비츠키는 제아무리 공중제비를 한다한들 허무와 부조리한 현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차마 긍정을 말할 수는 없다고 하는 듯하다. 60년대 폴란드 뉴웨이브의 수작 *LMDb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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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24 umma55  
막연하게 생각했던 폴란드인의
이차대전 트라우마가 영화 한 편으로 확연하게 느껴지더군요.
서사적인 연출보다 더 효과가 있었던 거 같아요.
13 리시츠키  
맞습니다. 동유럽 국가들이 이차대전과 스탈린에의해 굉장히 힘들었던 역사를 겪어서,
자유가 없었던만큼 동구권 감독들이 그 역사속에서 뉴웨이브라는 더욱 자유롭고 시테마틱한 형식과 내용의 시네마를 개가할 수 있었던거 같습니다.
당시 소비에트 영화들도 볼때마다 늘 거의 전쟁영화고, 동구권 뉴웨이브 영화들도 마찬가지로 전쟁과 늘 관련지어지고,
그들 영화들의 전쟁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참으로 모진 역사의 아이러니네요.

암튼, <공중제비>는 주인공과 마을사람들이 겪는 트라우마와 신경증의 추상적이고 자조적인 그런 알송달송한 정병적 증상을 내용으로 하는지라,
형식면에서도 감독이 그런 낯선 연출을 할 수 밖에 없었던거 같기도 합니다. 전쟁과 독재를 겪는 인물들을 허리우드처럼 말짱히 보여주는것도 거짓이라 여겼을테지요.
뭐 그래서 이해도 어렵고 이입도 어려운 영화였던거 같지만, 저는 그래도 새로운 영화 한 편을 본거 같아 좋았습니다.

암튼, 덕분에 또 신세계를 알아갑니다~ 고전영화들은 정말 파도파도 끝이 없네요~
날이 오늘도 매우 춥네요. 따뜻한 저녁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