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력 (Buoyancy, 2019)

영화감상평

부력 (Buoyancy, 2019)

13 리시츠키 1 104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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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oyancy (2019)
Directed by Rodd Rathjen    
Cinematography by Michael Latham    



1932년의 부뒤는 물에서 건져지지만, 21세기 부뒤들은 더욱 가혹한 착취 속에서 익사한다.
혹은 부뒤와 부뒤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인다. 보이지않는 시스템, 텅 빈 과녁.
선장은 물론 잘 알고 있다. 지배의 가장 쉬운 방법은 갈라치기라는 것을.
두 쪽으로 딱 갈라놓으면, 선장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거나말거나 그 과실(큰 물고기)는 선장이 갖는다, 혹은 그럼으로써.

챠크라만 가난한게 아니다. 미얀마인도 태국인도 착취당하기에는 우열이 없다. 그러나 그 갈라치기 논리는, 또다른 논리를 잉태하고 말단에서의 각자도생

(이라는 젊잖은 단어는, 실은 노예의식과 약육강식 생존법의 내면화에 다름 아니다. 함께 지옥을 만들고 그속에서 사이좋게 뒹굴어보자는 얘기다), 폭력의 재생산을 공고히한다.

사실 지배자들의 갈라치기 논리는 무논리의 논리다. 챠크라에게 죽임당한 소년은 무슨 죽을죄를 졌는가.

폭력과 공포의 효과, 이처럼 지배자의 무논리는 피지배자의 무논리가 된다.

21세기 자본은 이 무논리의 메카니즘을 반복한다. 착취에는 이유가 없고,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모순을 직시한 챠크라는 죽은 동료의 뼈다구로 선장을 때려죽이고, 배를 돌려 만연한 미소를 띈 채 고향에 돌아온다.

돈과 권총과 (죽은 선장과) 함께, 착취당한 또다른 피해자들(스스로를 죽인 챠크라 자신)은 놔둔 채.

그리고 그는 자신이 돌아갈 집이 더이상 없다는 것을 집 앞에 와서야 깨닫는다. (이 장면에서 집이라는 기호를 갑자기 순수니 노스텔지어니, 가족의 따뜻함 따위로

-그것도 챠크라가 눈물까지 흘리며- 담론화하는것은 감독의 너무나 나태한 시선이며, 안일한 내부적 오리엔탈리즘에 다름 아니다.

물론 샷/역샷, 시점샷, 연속편집으로서 주인공과 동일시하는 강렬한 연출과 스릴러적 긴장은 영화 내내 훌롱했지만,

이부분에서의 시나리오는 쓰다말았다는 반증이기도 할것이다. 클리셰로 때우려는 생각이 역력하다)

발길을 돌려, 한국트럭(KIA)을 타고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떠나는 챠크라.

그가 가는 곳이 어디든 착취와 폭력이 만연한 세상을 벗어나기는 불가능할테지만, 영화 끝날 쯤 감독은 궂이 트럭씬을 넣어 제안한다.

돈과 권총의 부력, 각자도생의 부력을 멈추고, 빈자들의 연대라는 부력을 *LMDb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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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17 oO지온Oo  
뭔가 심각한 영화로군요. ^^;;;;;;;
어느 나라가 안 그렇겠습니까.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