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의 시간 - 출구 없는 청춘, 대책 없는 영화
영화 <사냥의 시간>이 우여곡절 끝에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파수꾼> 이후 조바심을 내며 10년 동안 기다리던 영화였다.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파수꾼>의 소년들은 성장했을까?'라는 궁금증. 윤성현 감독은 케이퍼 무비(강탈 영화)라는 장르물을 들고 돌아왔다.
영화 <사냥의 시간>은 벗어날 수 없는 악몽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의 색채는 시종 어둡고 미로를 헤매는 청춘들에겐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준석(이제훈), 기훈(최우식), 상호(안재홍), 상수(박정민), 네 명의 소년은 지옥(헬조선)에 있다. 소년들은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지만 악몽의 늪은 더 깊숙이 그들을 공포 속으로 빨아들인다. 그들이 벗어나고자 했던 현실과 꿈의 낙원(대만 컨딩) 사이에서 소년들은 길을 잃는다. 그들이 발을 들인 곳은 무간지옥의 미로였다. 이곳이 지옥인 이유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어디에 있든 벗어날 수 없으며, 이전에 살던 세상이 아니기 때문'(청부살인업자 '한'의 대사)이다. 소년들이 현실 밖 출구라고 생각했던 통로는 수련(시련)의 과정이나 통과제의가 아니라 그저 치기 어린 일탈이었다는 것이 이 영화의 첫 번째 패착이었다. 불법 도박장을 털기 위해 무장강도질을 할 때 경비원이 복면을 쓴 소년들에게 묻는다. '니들이 지금 뭔 짓 하는지 알고 하는 거냐고?' 그 질문을 윤성현 감독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난산 끝에 10년 만에 들고 돌아온 <사냥의 시간>을 통해 감독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소년들은 자신들의 꿈을 위해 강도질을 모의한다. 케이퍼 무비는 밑밥(사전 설정)이 중요하다. 꼭 그래야만 하는 피치 못할 사정(개연성)이 있어야 이야기에 동력이 생긴다. 영화 시작 후 23분 동안 밑밥을 깔았지만 건드리다 만 현실의 디테일 때문에 이야기는 밋밋하게 흘러가고 관객들 멱살잡이에 실패한다. 인물의 상황과 행위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30분쯤부터 본격적 강탈 액션이 시작되지만 손바닥에 찔금 땀을 쥐게 하고는 그만이다. 납득과 공감은 청부업자 '한'이 이유 없는 사냥 게임을 선언(1시간 15분, '재밌네'라는 대사)하면서 수렁에 빠진다. 한은 '사냥의 시간'이 재밌을지 몰라도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는 관객은 하나도 재미가 없다. 소년들은 (10년 전 '파수꾼'의 현실에서) 한 치도 자라지 않았다. 그들의 모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영화 속 스틸 사진 이미지처럼 미숙하기 짝이 없다. 윤성현 감독의 연출 기술도 미숙하긴 마찬가지다. 의미 없는 추격전과 맥빠진 총질이 난무하더니 뜬금없이 괴물 같은 현실과 맞서 싸우라고 독려한다(도망치던 준석, 1시간 48분에 첫 각성 : 싸우는 수밖에 없어). 출구 없는 청춘들에게 바치는 이 응원(혹은 결론)은 전제부터 잘못됐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야 싸울 것 아닌가? 가장 공포스러운 상황은 선택지도 없고, 꾸역꾸역 뭔가를 선택했지만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가위눌림이다. 거기까지는 알겠다. 한국 청년들의 암울한 상황을 다룬 우화인 건가? 다, 좋다. 그런데 (헬조선에서 낙원으로)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우라고만 하고, 상대가 누군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설명 없이 서둘러 영화가 끝나버린다. 왜 그래야 하는지 끝내 납득과 설득에 실패한 채.
영화 속 인물이나 그들을 지켜보는 관객 모두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허망한 이야기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비극은 예견돼 있었다. <사냥의 시간>에는 (방황하는 청춘들의 성장통이라는) 감흥도 없고 (장르물의) 재미도 없다. 아름다운 불꽃을 쏘고 싶었겠지만 결과는 오발탄. <버닝>의 강박과 비현실적 비약(주인공 종수는 결국 소설의 판타지 속으로 도망친다)만큼이나 입맛이 쓰다. 10년을 기다려 온 <파수꾼>의 후속작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개연성에 대한 집착이 너무 부족했다고 느꼈어요. 치열하지 못하달까요. 저도 많이 공감되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넷플릭스 영화는 계속 걸러야겠어요. 지금도 인포머 보는데 이 댓글 달고 꺼야겠어요.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