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영화를 다시 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처음 본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는 <라쇼몽>(50)이었습니다. 일본 영화 보기가 힘든 시절이었서 낡은 비디오 테이프로 대학 동아리방에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처음부터 싫었습니다. 주제가 너무 부각되어서 영화가 웅변이나 선언문 같았고 시대와 맞지 않는 서구 음악(<라쇼몽>에선 라벨의 볼레로)에 실소가 나왔습니다.
<라쇼몽>에서 다루는 인식의 상대성이라는 것도 두 차례 세계 대전을 겪고 난 후 서구 지식인들이 좋아할만한 철학적 주제를 다루는 것으로 여겨졌고 무엇보다 그런 상대적 관점이 전범국으로서 일본의 모호한 입장을 위장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거기에는 우리가 6.25 동란을 겪고 있을 시기에 저런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 대상을 받았구나하는 식민지 영화광이 가지는 묘한 질투심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주요 작품들을 띄엄 띄엄 봤지만, 이미 내 마음 한구석엔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 야마나카 사다오, 나루세 미키오, 시미즈 히로시 같은 위대한 감독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아키라 감독에 대해 마음이 열리지 않았지요.
비디오로만 보던 <7인의 사무라이>(54)를 시네마테크에서 처음으로 스크린으로 봤습니다. 여러번 봤던 이 영화가 그제서야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이 아니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영화사적 지식을 갖춘 분이라면 당연히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는 미국 영화 <성의>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 영화가 개봉된게 1953년도입니다. 일본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와이드 스크린 영화는 <지구 방위군>이라는 특수 촬영 영화로 1957년도 작품입니다. 토호 영화사 영화지요. 토호 영화사 소속이었던 구로사와 아키라도 재빨리 이 화면 비율에 맞는 영화를 만듭니다. 그의 경력 중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는 1958년작 <숨은 요새의 세 악인>입니다.
그러니 1954년작 <7인의 사무라이>가 2.35대 1의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아니라 1.33대 1의 TV 화면 비율이라는 건 상식적인 수준의 문제입니다.
<7인의 사무라이>가 와이드 스크린의 영화라고 생각한데에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시대극(= 지다이케키)은 당연히 2.35대 1 사이즈로 찍었을 거라는 선입견이 작용한 것이지요.
구로사와 아키라의 필모를 들추어보면 그가 만든 시네마스코프 영화는 58년부터 65년까지 만든 여섯 편에 집중됩니다(<숨은 요새의 세 악인>, <나쁜 놈이 더 잘잔다>, <요짐보>, <츠바키 산쥬로>, <천국과 지옥>, <붉은 수염>).
(좌) 1.33: 1의 화면비인 <7인의 사무라이> (우) 2.35: 1의 시네마스코프 와이드 스크린 화면비인 <요짐보>
세로 값을 1로 두었을 때 화면비의 차이. 보통 영화관에서 흔히 보는 화면비는 1.85:1이다.
일반적으로 한편의 영화는 동일한 화면비를 유지하나 <다크나이트>, <자객 섭은낭>, <그랜드 부타페스트 호텔> 같은 영화에서는 영화 중간에 화면비가 바뀌기도 한다.
1968년 이후 구로사와 아키라는 슬럼프에 빠집니다. 미국에서 찍으려던 <폭주 기관차>의 제작 무산, 할리우드와 합작으로 만들려고 했던 2차대전 영화 <도라! 도라! 도라!> 제작 과정에서 제작사와의 불화와 감독직 탈퇴, 최초의 컬러 영화 <도데스카덴>(70)의 흥행 실패, 구로사와 아키라의 개인 프로덕션의 부채 문제... 결국 구로사와 아키라는 면도칼로 손을 긋는 자살 시도까지 하게됩니다.
이후 구소련과 합작을 한 재기작 <데루스 우잘라>(75)를 찍게 되는데 이 영화의 화면 비율이 2.20: 1입니다. 그 이후로 우리가 너무 나 잘알고 있는 <카게무샤>(80)나 <란>(85)도 일반 화면비인 1.85:1 사이즈로 찍었지요.
이 이야기를 왜 길게하느냐면 '구로사와 아키라 = 시네마스코프'라는 것처럼 그의 영화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들을 다시 보고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들추어보면서 흥미로운 점들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구로사와 아키라를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연출 스타일을 새롭게 알게된 것이지요.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이었던 앙드레 바쟁은 구로사와 아키라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당시 카이에에서 글을 쓰던 프랑수아 트뤼포는 바쟁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미조구치 겐지가 구로사와 아키라보다 더 뛰어나 보였으니까요. 얼마 뒤 혈기왕성했던 카이에의 젊은 평론가들은 미조구치와 구로사와를 비교하는 지상논쟁을 실었습니다. 미조구치를 옹호한 그들이 구로사와를 사랑하는 바쟁에게 도전을 한 것이지요..
그때 바쟁이 트뤼포에게 편지로 쓴 유명한 글. "당신과 다시 한번 미조구치 영화를 보러 갈 수가 없어서 아쉽습니다. 나는 여러분만큼이나 미조구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훨씬 더 그를 좋아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동전의 양면과 같은 입장에서 구로사와를 또한 좋아합니다. 밤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낮을 알 수 있을까요? 만약 누군가 미조구치를 사랑하기 때문에 구로사와를 미워한다면 그의 이해력은 지극히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구로사와와 미조구치를 비교해서 구로사와를 더 좋아한다면 그는 분명 장님입니다. 그러나 오직 미조구치만 좋아하는 사람도 외눈박이에 불과할 것입니다".
가지고 있던 개인적 선입견을 조금 들어내고자 <츠바키 산쥬로>와 <천국과 지옥>에 대한 글을 준비 중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사무라이 집안 출신이니 (전쟁의 책임 보다) 군인의 명예를 중시했고 중도에 감독 해임이 되자 울분에 차서 사무라이가 할복하는 심정으로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찌보면 똘끼가 충만하죠.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정치나 사회 문제 보다는 개인적 도덕성 또는 명예가 훨씬 부각됩니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작품도 사실상 도덕성이라는 주제에 종속됩니다. 여전히 제가 그를 싫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칼 대신 카메라를 든 사무라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