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놓치지 마세요 - 1

영화이야기

이 영화를 놓치지 마세요 - <중혼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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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이 되면 해마다 그 해의 걸작을 꼽아 보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되었습니다. 지난해에도 많은 영화를 봤습니다. 하지만 개봉작 중에 힘주어 언급하고 싶을 만한 작품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뒤늦게 본 고전 영화에서 저는 더 큰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시네마테크에서 본 알렉세이 게르만의 <전쟁 없는 20>(1976)은 숨가쁜 걸작이었고 유튜브 영상으로 본 아이다 루피노의 <중혼자>(1953)는 가슴 먹먹한 여운에 며칠을 밤잠을 못 이루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두 작품은 각각 macine님과 Harrum님의 노력으로 현재 씨네스트 자막 자료실에 한글 번역으로 올라와있어 쉽게 감상이 가능합니다. 놓치지 마시실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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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혼자>는 홍보용 포스터가 이미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제 The Bigamist가 중혼자, 이중 결혼을 한 사람을 칭하는 용어인데 포스터를 보면 두 여자 사이에 한 남자가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이 남자와 결혼을 한 법적 배우자입니다. 남자의 왼쪽 아래로 남자를 가르키는 손가락이 그려져 있고 그 손 안에는 제목의 일부인 정관사 ‘The'가 보입니다. 굳이 손 안에 이 문자를 그려 넣은 이유는 뭘까요? 정관사는 무언가를 특정하거나 제한할 때 사용되는 품사입니다. 그러니까 이 손가락은 정관사처럼 제한된 규칙과 법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수퍼 에고, 라캉식으로 이야기하면 상징적 질서를 의미하는 손가락이 이 남자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부일처의 유일무이한 질서인 결혼제도를 이 남자가 어겼기 때문입니다. 포스터를 다시 보면, ‘bigamist' 중에서 알파벳 a를 대문자 빨간색 A로 표기했습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이것은 너데니엘 호손의 <주홍 글씨>에 나오는 대문자 A, 즉 간통(Adultery)을 의미하는 그 주홍색 글자를 달고 살아야했던 여주인공이 생각날 것입니다. 포스터의 A를 붉게 칠한 것도 이 남자가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이중 결혼을 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대문자 A, 비난의 손가락, 남자가 서 있는 영역이 모두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점도 유의해서 봐주십시오. 그러면 이 남자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일까요? 그게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제목 ‘BIGAMIST'에서 A를 제외하고 보면 BIG MIST,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남자는 거대한 안개(big mist)와 같은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가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 안개가 점점 걷혀나가고 이 남자를 바로 보게 됩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해리와 이브 부부는 결혼 8년차를 맞이하는 부부입니다. 해리는 냉장고 세일즈맨이고 아내 이브는 경영에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비즈니스 파트너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아이가 없고 영업 때문에 해리는 일터가 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출.장지의 휴일 날, 외로움을 느낀 해리는 할리우드를 순회하는 관광버스를 타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중 필리스라는 여성을 만나고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필리스 역시 대도시에서 말할 수 없는 고독을 느끼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영화는 이 두 사람의 사랑이 서서히 싹트는 과정을 은근하게 묘사하는 연출이 대단합니다.


이윽고 해리의 생일에 두 사람은 맺어지고 얼마 뒤 필리스는 임신을 하게 됩니다.  한편, 회사 일로 바빴던 이브는 아버지의 사망 후 뒤늦게 가족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아이를 입양할 계획을 세웁니다. 해리는 두 여자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다가 아내 이브에게 이혼 사실을 말할 기회를 놓치고 두 가정을 가진 중혼자가 되어버립니다.

입양의 결격 사유를 심의하는 조사관이 해리의 이상한 행적에 의심을 품게 되고 결국 해리의 범죄는 발각됩니다. 영화 후반부는 법정 장면으로 이어지며 해리는 중혼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영화는 1953년에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이 해에 아이다 루피노는 <히치하이커>라는 걸작 필름 누아르를 먼저 만들고 그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에드먼드 오브라이언을 다시 해리 역으로 캐스팅합니다. 이브 역은 히치콕의 <레베카>(1940)에서 주연을 맡은 조앤 폰테인. 그리고 필리스 역은 아이다 루피노 자신이 직접 출연을 합니다. 그러니까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전에 카메라 앞과 뒤를 오가며 연기와 연출을 겸한 사람으로 아이다 루피노라는 출중한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 아이다 루피노는 자신의 남편이자 영화의 각본과 제작을 맡은 콜리어 영과 이혼한 상태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콜리어 영의 새 배우자가 조앤 폰테인이었다는 것이고 그녀는 아이다 루피노의 영화에 간절하게 출연하고 싶어했습니다. 아이다 루피노는 흔쾌히 그녀를 이브 역으로 캐스팅합니다. 참으로 쿨내가 진동하는 여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글이 너무 길어져서 일단 여기서 맺고 다음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아이다 루피노 연출이 왜 훌륭한지에 대한 분석이 될 것입니다. <중혼자>를 안 보신 분들은 미리 보시고 제 글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s. Harrum님의 <중혼자> 한글 자막: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2062619&sfl=mb_id%2C1&stx=ausen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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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Comments
루피노의 '히치하이커' 정말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차 하나랑 남자 셋이서 꽤 긴장감 있게 '남성성'의 문제를 풀어내더요.
이거랑 The Trouble with Angels는 꼭 봐야겠네요.
<히치하이커>는 두 남자가 낚시 핑계를 대고 아내들 몰래 유흥을 즐기러 갔다가 미친 히치하이커에 낚여서 개고생을 하는 이야기지요.
심각하지만 따지고보면 상황은 굉장히 코믹하기도 합니다. ^^
재밌는 사실은 <히치하이커>나 <중혼자>나 모두 실제 미국에서 있었던 사실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이 두 영화 모두 갇힌 남성을 보여준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히치하이커>에서 두 남자는 사이코 히치하이커한테 갇힌 상태이며, <중혼자>에서 남자는 두 가정에 갇힌 존재이니까요.
아이다 루피노는 <히치하이커>의 실제 범죄자인 존 쿡을 취재하러 교도소를 방문했고 연쇄살인범과 면담까지 했더군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과 직접 면담을 한다는 것은 지금봐도 획기적인 일인데.. 루피노는 정말 배포가 엄청 큰 여성이었던 거죠.
The Trouble with Angels 완전 강추입니다.
헤일리 밀즈 영화를 원래 참 좋아하지만 여기서도 정말 일품 캐릭터더군요.
아이다 루피노는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연출의 능력이 있는 느낌입니다.
토마스 모어님, The Trouble with Angels 한글 자막을 구할 수 있을까요? 혹시나 해서 문의드립니다.
당장은 안되고 하반기쯤은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DVD 자막이 엉망입니다.
아 글쿤요. 답변 감사합니다. (_ _)
15 Harrum  
드디어 발표됐군요~
아즈너 감독님에 이어 루피노 감독님도 제 마음에 조금씩 자리잡고 있어요.
말씀 들어보니 여장부가 맞군요.
전 제2장을 얌전히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