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자리는 어디인가?

영화이야기

배우의 자리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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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츠츠이 야스타카가 1965년부터 이듬해까지 총 6회에 걸쳐 잡지에 연재한 SF 소설입니다 1967년에 단행본으로 가도카와 서점에서 정식 간행되었는데 '시간 여행자'에 대한 발상이 참신해서 이후 여러 편의 영화와 드라마, 애니까지 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2006년에 공개된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입니다만, 이 작품은 원작 소설의 후일담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원작과 무관하며 사실상 독립적인 작품입니다. 그래서 시네필이라면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의 1983년 극영화가 더 떠오를 것입니다.

위에 언급했듯이 츠츠이 야스타카의 소설을 출간한 출판사는 가도카와 서점, 즉 가도카와 쇼텡이라고 불리는 일본 굴지의 출판사입니다. 일본 영화를 열심히 챙겨보신 분들은 이 출판사의 사장인 카도가와 하루키라는 인물이 일본 영화사에 차지하는 위치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불세출의 인물은 1975년에 부친이 운영하던 출판사를 승계한 뒤 그 다음해부터는 새로운 경영 전략으로 가도카와 쇼텡이 판권을 소유하고 있는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영화사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나섭니다. 철저한 상업적 전략과 엄청난 투자로 일본 영화의 외연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은 일본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영화사를 차린 가도카와 하루키의 전략 중에 하나는 신인 배우를 발굴하여 아이돌 스타를 만들어서 상품성을 높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이름난 배우들에게 지불할 개런티를 줄이고 그 돈을 영화 제작에 더 투자하겠다는 것이 제작자로서 가도카와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이래서 탄생한게 가도카와 자매들, 즉 야쿠시마루 히로코, 와타나베 노리코, 그리고 하라다 토모요입니다. 1980년대에 이웃 일본의 엔터테인먼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이들 이름을 결코 모를 수 없습니다. 일본의 연예 잡지에 이들은 브룩 쉴즈,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과 함께 거론되던 인물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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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공개 오디션을 통해 하라다 토모요라는 당시 중학교 3학년의 대형 신인을 발굴한 케이스입니다. 하라다 토모요는 다시봐도 그렇게 예쁜 얼굴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소녀입니다. 작은 눈에 덧니가 있는 단발의 소녀. 재미난 것은 제작자 가도카와 하루키가 토모요를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렸다는 것입니다. 당시 마흔 한 살이었던 하루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열 여섯의 평범한 외모의 소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요. 사실 여기에는 가도카와 가문의 복잡한 집안 내력이 있습니다. 하루키의 선친, 그러니까 가도카와 겐요시는 일본에 이름난 문학가이면서 출판사를 창업한 경영자로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자 관계가 상당히 복잡해서 이 여자, 저 여자에게서 자식들을 많이 낳았다고 합니다. 하루키와 친했던 이복 여동생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뒤늦게 알고 그 충격으로 어린 나이에 자살을 하게 되고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복 동생의 나이는 새로 발굴한 신인 하라다 토모요와 비슷한 또래였던 것 같습니다. 가도카와 하루키는 연출을 맡을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을 불러 이런 저런 주문을 하면서 꼭 히트작을 안만들어도 되니 개인의 추억이 될만한 작품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넌지시 하게 됩니다. 그에게 하라다 토모요는 일회용 배우로 쓰고 동생의 추억과 함께 버릴 배우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야기는 이제부터 입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닛카츠 찰영소에서 찍었습니다. 일본 최초의 메이저 회사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 유명한 닛카츠 영화사의 촬영소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라 세츠코와 다카미네 히데코도 영화를 찍었던 그곳입니다. 오바야시 감독은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얼굴의 하라다 토모요를 불러다 놓고 이른바 스튜디오 시대의 배우 교육을 시킵니다. "봐라! 여기서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나왔다. 너도 이제 그 선배들처럼 여기서 자라는거야. 지금 시대 탤런트는 자기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고 쉬고 있다. 하지만 예전의 여배우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여배우는 모두와 함께 있고, 모두가 준비를 하는 것을 눈여겨 보고있고, 자신이 나오지 않는 장면에도 찾아와서 자신의 연기를 쌓아나갔다. 그러니 너도 이 스튜디오에 함께 있어야 한다." 오바야시 감독은 토모요에게 스튜디오에 입회해서 기본기를 배우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튜디오 안은 여러 기자재들로 토모요가 서있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비좁은 곳이었습니다. 오바야시 감독은 조그마한 디렉터스 체어를 하나 구해서 '하라다 토모요'라고 써붙이고 그걸 건내며 다치지 않는 곳에서 앉아서 잘 지켜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녀는 작은 몸으로 의자를 들고 다니며 앉을 자리를 찾아 세트장을 어슬렁거렸던 것이지요. 어느 날 촬영 세트를 아직 세우고 있을 때였습니다. 스튜디오 한 곳에 토모요가 의자를 탁놓고 앉으니까, 오바야시 감독이 '이제 적당한 자리를 찾았나보네?'라고 묻습니다. '네, 여기서는 방해가 되지 않아서 괜찮을 것 같아요'라고 그녀가 대답했지요.


오바야시 감독이 토모요에게 '위를 봐!' 하고 말을 합니다. 토모요가 올려다보니 발 디딤판이 하나 둘러져있고 그 위로 망치니 못이니 뻰치니하는 연장을 잔뜩 허리에 매달고 있는 할아버지 한 명이 걸어다니고 있었습니다. 오바야시 감독이 잠시 후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애야, 내 말을 잘들어라! 저 할아버지는 이 영화계에서 벌써 50년을 일하고 올 해는 그 공로로 표창을 받는다. 하지만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언젠가 실수를 할지 모르지. 저 할아버지의 허리에서 오늘 망치가 떨어져 너 머리 위를 맞히면 너가 다치게 되겠지. 그러면 저 할아버지의 노력이 들어간 영화 인생은 엉망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자신이 다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너를 다치게 할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야. 그것이 바로 팀웍이라는 것이다. 그것까지 생각하고 너의 위치를 정해야 하는 것이야'


이 말이 끝나자 말자, 하라다 토모요는 오바야시 감독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합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 이후 스튜디오에서 하라다 토모요는 스탭들이 식사를 할 때 같이 거들면서 누가 어디가 아픈지, 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배워갑니다. 그 당시에는 야식으로 돼지 육수가 제공되었는데 스탭들이 바빠서 때를 놓치면 그것을 버려야 했다고 합니다. 토모요는 그것이 아깝다고 일일이 그릇을 들고 다니며 스탭들에게 떠먹이다시피 했다고 하네요. "이 돈육수 드셔보세요. 정말 맛있어요!". 남은 육수도 끝내 버리기 아까워서 자신도 하루에 서너번씩 먹기도 했고요.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스튜디오에 하라다 토모요를 칭찬하는 말이 많아지게 됩니다. 오바야시 감독이 결국 제작자 가도카와 하루키를 설득을 해서 원 히트 배우가 아니라 롱 런할 수 있는 배우로 만들었던 것도 하라다 토모요의 배우로서 자세 때문일 것입니다.


이 일화는 원칙을 잃어버린 세상에 정도를 중요시했던 사람들의 철지난 이야기처럼 아득히 멀게만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일화를 들으며 가슴이 찡해져 오는 것은 그 시절 그 시간으로 달려가고 싶은 그리움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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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Comments
15 달새울음  
말 그대로 꼰대같은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는 요즘이네요.
그래도 훈훈하게 들리니 어쩌겠습니까.
시계있고님의 재미난 글을 너무 오랜만에 읽어서 감격스럽습니다.
길어서 가독률이 떨어질텐데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32 Cannabiss  
글이 너무 길어서 눈이 핑핑 도네요
20 암수  
역시...길지만 워낙 필력이 쉽고 재밌게 쓰셔서 술술 잘 읽었습니다..
건강이 그래도 어느정도 회복이 되신듯 하네요..
다나카 키누요 다큐를 봐도..어린시절 영화배우로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첨엔 세트장에서..눈치껏 고생 많이 했더만요..
어느 분야던지 기본부터 배우겠다는 자세가 중요한데..
요즘 사회분위기는 일단 상사된 입장에서는 이런 밑바닥 기본을 강요해선 안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어서..
하나의 단계가 건너뛴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올해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암수님도 좋은 활약 바랍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21 Login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ps. 제 복도 가져가세요
15 Harrum  
배우뿐만 아니라 모두가 지녀야 할 태도 같습니다.
좀 뜨끔합니다.
3 투달스119  
읽을까 말까 고민 되는 긴 글이네요. 휴대폰에 익숙한 요즘 조금 긴 글은 참 상대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다 읽고 나니 좋은 글이었습니다. 읽을까 말까 고심된 것이 후회되네요.
아마도 내용이 좋지 않았다면 금방 패스할 수도 있었다는 ㅋ
S 한움  
오랜만에 올라온 영화 박사 하스미님의 글  반갑게 잘 보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4 티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다 이유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