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문득 생각나는 영화

영화이야기

비오는 날 문득 생각나는 영화

아침에 일어나면 공기가 차가워져 있고 창을 열면 제법 가을 향기를 느낄 수 있으니. 이제는 '지난 여름'이라는 말을 써도 될 듯합니다.

올 해는 비가 참 많았던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지가 익어버릴 것 같은 열기에 비를 기다리다가도 막상 너무 많은 비가 오면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비 내리는 창 밖으로 우산을 쓰고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문득 어떤 노래가 혀 끝에 올라왔습니다. 지난 여름, 며칠을 혼자 중얼거리다가 결국 그 노래가 나오는 <쉘부르의 우산>을 다시 봤습니다.


자크 드미 감독의 1963년작 <쉘부르의 우산>을 딱히 눈여겨 본 적이 없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색상과 감미로운 음악이 유원지에서 파는 정체 불명의 아이스크림 같이 느껴졌기 때문일까요. 이번에 이 영화를 다시보니 정말 좋았습니다. 제목에는 우산이 나오지만 주인공 남녀가 끝내 우산을 쓰지 않고 운명처럼 비와 눈을 맞고 세월을 견디고 산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영화의 도입부가 인상적이어서 그 부분을 자세히 소개할까 합니다.


어두운 화면의 중심에서 동공이 열리는 것처럼 원형의 화면이 펼쳐지면서 전체 화면이 들어오는 아이리스 인으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자크 드미 영화를 많이 보신 분은 이미 <롤라>(1960), <천사들의 해안>(62)에서 익숙한 방식이라 드미의 인장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화면이 다 열리고 나면 나타나는 화면의 풍경은 어떤가요. 앞의 두 작품 외에도 <로슈포르의 연인들>(66), <도심 속의 방>(81)에서도 예외 없이 바닷가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드미가 바라 보는 세상의 모습은 한없이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사나워지는 바다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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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비가 올 것 같이 흐린 하늘이고 어디선가 뱃고동 소리도 희미하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항구의 원경에서 카메라가 천천히 틸트 다운하면 90도 수직 부감으로 잡힌 보도의 돌덩이에 비가 하나 둘씩 뚝뚝 떨어집니다. 그리고 미셀 르그랑의 너무나도 유명한 주제곡이 비와 함께 화면에 조용히 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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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걷는 사람들 중에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우산을 펴는 사람, 옷깃을 세우고 달려가는 사람, 비옷을 입은 사람, 흰 모자에 세일러 복을 입은 수병의 모습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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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가 점차 굵어지자 젖은 보도 위를 걷는 사람들의 속도도 빨라지고 붉은 우산이 지나가고, 푸른 우산이 지나가고, 노란 우산이 지나가고, 초록 우산이 지나가고 형형색색의 우산이 빠르게 오갑니다. 이제 비의 기운도 거세지고 본격적으로 비가 내립니다. 시네마스코프 화면에 색체가 풍부한 우산이 스크린을 오가고 마침내 검은 우산 행렬이 마치 장례식의 대열처럼 무심히 화면을 가로지르는데 죽음처럼 슬픈 결말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화가가 되어 화면을 캔버스처럼 사용하면서 수채화를 그려내는 감독의 솜씨도 놀라운데 이어지는 장면은 장탄식이 나오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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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자크 드미'라는 타이틀이 나온 뒤에 카메라는 고개를 들 듯 틸트 업하고 카메라는 처음으로 돌아오자 이미 비오는 항구의 풍경이 멀리 새겨져 있습니다. 꿈을 꾸듯이 아름다운 이 오프닝 장면은 놀랍게도 롱테이크로 찍은 하나의 쇼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면은 다양한 색감으로 눈부시지만 카메라 움직임은 단 하나 뿐이라는 것입니다. 화려한 언변 뒤에 나타나는 과묵함이라 할까, 이 도입부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모영화 평론가가 서울 독립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단편 영화를 보여주면서 두 개의 쇼트에 하나의 움직임(틸트 업)으로만 되어 있다고 설레발을 떨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의 비밀이 그 영화에 다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평론가에게 <쉘부르의 우산>을 봤는지 묻고 싶습니다. 물론 그 영화는 전체가 하나의 카메라 움직임이고 드미의 영화는 한 장면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제 느낌은 얄팍한 재주와 심혈을 기울인 세공의 차이가 확연하기 때문입니다.


누벨바그 감독과 마찬가지로 자크 드미도 독립 단편 영화로 출발합니다. 프랑스의 영화 연구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동인들은 자크 드미의 팬이었습니다. 장 뤽 고다르도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에 자크 드미에 대해 '자크 드미 방법서설'이라는 기사를 그 잡지에 쓴 적이 있습니다. 고다르는 자크 드미가 놀라운 점은 무엇보다도 정확성을 갖추고 있다면서 드미의 영화가 왜 이렇게 아름답고 아름다워야 했는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훗날 자크 드미가 자신의 영화 <Made In USA>를 좋아한다고 말하자 고다르는 뛸 듯이 기뻤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고다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나는 <Made In USA>는 노래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 <중국 여자>는 이야기하는 영화다... <Made In USA>는 <쉘부르의 우산>과 가장 유사한 영화다. 인물은 노래하지 않지만 영화는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다르는 <여자는 여자다>의 음악을 미셀 르그랑에게 의뢰하였고 <국외자들>에서도 그에게 음악을 부탁하면서 <쉘부르의 우산>의 주제곡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도 <쉘부르 우산>을 정말 좋아해서 가사와 멜로디를 전부 다 외워서 따라 불렀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자크 드미는 비평을 쓰지 않았지만 <카이에 뒤 시네마> 시절부터 고다르와 트뤼포와 의기 투합해서 친구처럼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만약 누벨바그를 즉흥 연출이나 저예산 영화 만들기로 규정한다면 드미 감독은 알랑 레네와 마찬가지로 누벨 바그와 정반대 방식으로 영화를 찍는 영화 작가입니다. 사전에 정밀하게 콘티가 작성되어야 뮤지컬의 사운드(노래와 음악) 테이프가 구성되고 거기에 맞추어 플래쉬 백으로 촬영이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드미의 <로슈포르의 연인>(65)처럼 올로케를 하는 경우라도 거리나 나무 건물을 모두 페인트로 색칠해 세트처럼 만들어버리니 제작비도 엄청 많이 듭니다. 고다르의 영화에 비해 제작비가 평균적으로 세 배 이상이 들었다고 합니다. 언뜻 보면 누벨바그 감독이 선호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것은 오늘 날의 시네필이 책으로 누벨바그를 배워 편의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생기는 선입견이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내일부터 다시 비 소식이 있다고 하니 비오는 날 이 영화의 장면과 음악을 한 번쯤 떠올려보시길 바라며 글을 맺습니다.


p.s. 샹탈 아커만의 <80년대 갤러리>(1986)의 도입부는 이 영화와 유사합니다. 다만 실내에서 수많은 여성들의 오고가는 다리를 비춘다는 점에서 다르지요. 그러니까 아커만은 <쉘부르의 우산>과 히치콕의 <열차 안의 이방인>을 보고 자신의 영화 도입부를 어떻게 시작할지를 생각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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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3 킹오뚜기  
2 akadt  
S 한움  
정말 아름다운 영화로 기억되는 쉘부르의 우산 멋지게 소개한  이 글을 보니 다시 한번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