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퍼레이드 (1929), 장면 'Paris, Stay the Same'과 '여왕과 대신들 옥신각신'

영화이야기

러브 퍼레이드 (1929), 장면 'Paris, Stay the Same'과 '여왕과 대신들 옥신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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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Paris, Stay the Same'




장면 '여왕과 대신들 옥신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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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올려주신 클립 포함 총 세개의 클립만 봐도 에른스트 루비치는 역시 문을 참 잘 이용하는 연출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문 하나가 열고 닫힌 것 뿐인데, 문 안의 사람과 문 밖의 사람만 찍은 것 뿐인데 영화의 무드가 마법처럼 바뀝니다. 지난 번 클립 '여왕을 기쁘게 하는 것'에는 여왕의 접견실에서 알프레드 백작(모리스 슈발리에)와 여왕(자넷 맥도날드)이 의견 다툼이 있습니다. 여왕이 갑자기 일어나 종으로 문 밖에 있는 시종을 부르고 저녁 식사에 백작이 참여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왕의 권력을 이용한 일방적인 데이트 신청인데, 문이 열리고 닫히는 순간 분위기가 일순간 바뀝니다.
그리고 문 안의 두 남녀(백작과 여왕)가 주거니 받거니 사랑의 이야기가 오고가고, 문 밖의 시종은 문 틈으로 이들을 훔쳐봅니다. 씬의 마지막에 시종의 눈(= 관객의 눈)을 피해 두 사람은 접견실 안쪽, 커튼이 드리워진 여왕의 은밀한 숙소로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백작이 카메라라는 또 다른 문을 응시하고 한 마디 던지죠. '여왕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하겠다'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커튼 안에서 두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인지는 뻔한 일입니다. 공적인 장소인 여왕의 접견실 앞의 문이 있다면, 커튼은 사적인 장소 앞의 또다른 문입니다. 커튼이 열릴 때 살짝 비치는 그 안쪽의 컴컴함을 고려한다면, 루비치는 여성의 육체의 문처럼 느끼게끔 연출을 해놓았습니다. 이런 것이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숨어 있는 장면이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접견실의 두 사람의 대화 씬에서 배경으로 보이는 창문도 주목할 만합니다. 창틀은 (같은 독일 출신의 할리우드 망명 감독 프리츠 랑처럼) 직선이라 아니라 살짝 아래로 휘어진 곡선입니다. 배경 자체가 부드럽고 리드미컬하며, 여성의 신체 곡선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루비치의 터치가 묻어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위에 올려주신 '파리여, 이대로 남아주오'라는 릴을 보면 모리스 슈발리에의 노래 부르는 장면과 반응 쇼트로만 구성된 씬입니다. 각기 다른 공간이고 모든 쇼트는 다 따로 찍었서 붙인 것인데, 장소가 서로 바라보고 있는 느낌을 줍니다. 이것도 뒤에 창을 두고 있는 발코니라는 유사성 때문에 쇼트끼리 연결성을 가집니다. 중간에 슈발리에의 노래 소리를 듣고 창문이 한꺼번에 열리는 장면은 대단히 리드미컬해서 음악이 시각화 되는 느낌마저 듭니다. 여기에 동물들까지 호응하는 장면에 이르면 슈발리에가 부르는 파리의 찬가가 사람과 동물에게까지 닫힌 문을 열고 전파되는 것 같습니다. 창을 뒤로 두고 발코니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런 장면은 마치 뻐꾸기 시계를 보고 착안한 것이 아닐까하는 엉뚱한 상상까지 해봅니다.

마지막 릴 ''여왕과 대신들 옥신각신''을 보면 여왕의 집무실에서 여왕을 기다리는 대신들의 모습이 먼저 보입니다. 문이 열리고 여왕이 입장하고요. 이 때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 줄지어 서 있는 대신들의 모습들입니다. 한 명도 겹치지 않게 대신들을 나열시켜 놓았는데, 별 것 아니지만 화면 구도면에서 대단히 잘 구성된 쇼트입니다. 이들 대신 다수와 옥신각신해야 하는 여왕 자넷 맥도널드는 혼자 입니다. 대신들의 쇼트에서 여왕의 쇼트로 넘어갈 때 여왕의 존재감이 느껴집니다. 다수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 여왕의 권위. 대신들의 숫적 많음을 보여주기 위해 최대한 겹치지 않게 해놓았지만 여왕의 쇼트로 넘어가면 혼자인 여왕의 힘을 느끼개 하는 연출력. 그게 훌륭한 연출력일 것입니다. 이 씬의 마지막에서 여왕은 대신들에게 자신의 각선미를 과시합니다. 여태 여왕의 상반신만 보여주다가 하반신을 보여주는 그 치밀한 구성도 놀랍고, 이 씬의 중간에 집무실 바깥에서 슬쩍 훔쳐보는 슈발리에의 모습, 여왕의 각선미에 감탄하는 대신과 자신의 각선미를 과시하는 노출증의 여왕, 이 모든 것이 문과 커튼(여왕의 스커트 노출은 커튼이라는 문처럼 보입니다)이라는 첫 번째 릴과 유사한 연출이라는 점도 감탄할만합니다.
14 Harrum  
오늘 시계 님 글 보고, 이 영화 다시 보고, 책을 찾아 읽고, 컷과송님 글도 찾아보고, 낮잠 자다가, 또 글 읽다가... 아주 즐거운 휴일이었습니다.
시계 님 덕분에 아주 행복하고 유익한 하루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