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뤽 고다르와 존 카사베츠 (현대 영화의 두 거목)

영화이야기

장뤽 고다르와 존 카사베츠 (현대 영화의 두 거목)

1 타바스 2 920 1


    괄호는 인용문


  1960년대~1970년대는 존 포드, 로베르토 로셀리니

나루세 미키오, 루이스 부뉴엘, 로베르 브레송 등,

거장(수십년전부터)들이 말년의 걸작들이자

그들 최고의 걸작(형태적 절정의)들을 배출해낸 시기이

면서 새로운 형태의 걸작들이 나온 시기이기도하다.

그 중 발군의 감독들은 장뤽 고다르와 존 카사베츠 일 것이다.


 그들은 영화 매체의 미를 추구하기 보다는

삶 자체의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새계였지만) 모호한

순간을 영화라는 매체를 ‘이용’해서 담았다.

아마도 지가 베르토프는 영화사 초기의

그런 유형의 영화를 본격적으로 추구했던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베르토프는 삶의 진정한 순간은 비가시적인 것에

있다고 봤다. 보통 극 영화에서는 삶의 극적이거나

두드러진 순간을 위해 재미없는 부분은 최대한 보이지

않거나 아예 잘려있다. 베르토프가 추구했던 것은

그 부분을 흥미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베르토프의 간격 이론에서 뼈대를 이루는 것이다.

베르토프는 삶 자체의 에너지로부터 나오는

실재적 드라마가 있고, 이것이 극적 허구보다 더 강력하고

진실한 드라마임을 주장한다. (1) 영화에서는 중요한

순간의 극대화를 위해 부차적인 부분을 없앨 수 있지만

실제 삶에서 그러한 관계들은 결코 분리 될 수 없다.

베르토프는...포토그램 사이에 가능한 모든 관계,

특히 비연속적, 불연속적 관계들을 현실화한다. (2)


 문제는 베르토프가 실제 영화에서 그것을

얼마만큼 보였나는 것이다.

숏의 연쇄에 개재되는 심리적 기제를 차단하고

그 에너지를 물질의 생산적 흐름으로 유도할 방법이 있을까? (1)

베르토프의 영화는 소비에트 몽타주이고 소비에트 몽타주 (유럽식 몽타주)의

가장 큰 특징은 특정 이미지들의 반복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co_cine_scene&wr_id=204117&sfl=mb_id%2C1&stx=unhallowed

이글을 참조)


  보통, 숏의 연쇄에서 보는 이의 심리적 기제는

보는 이가 어떤 상황, 즉 가장 중요하거나 

두드러진 이미지를 파악하고 그 이미지가 중심이 된 ‘연속’체에 대한 예상(?)을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마치 음악의 청취에서 특정한 멜로디를 중심으로 

그에 어울리거나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음을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심리적 기제를 충족하기 위해 소비에트 영화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영화들이 

특정 이미지를 '반복'하는 몽타주를 이용하고 있다.  

당연히 지가 베르토프까지 그리했다. “Man with a Movie Camera”의 아래 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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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씬에서는 비록 선수들이 다른 종목을 하고 있지만

어떤 비슷한 행동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보인다.

투포환, 장대높이, 허들넘기, 배구 등 모두 어떤 경계 지점을

넘어야 하는 운동 들이다. 이 씬에서는 이런 경계 지점을 넘는 것을 계속 반복한다.

물론 이 씬이 잘 만든 것은 맞지만 과연 이것이 베르토프가 추구했던

“숏의 연쇄에 개재되는 심리적 기제를 차단하고

그 에너지를 물질의 생산적 흐름으로 유도할 방법이 있을까? (1)”에 대한 것인가?

이 씬의 이미지 관계들이 ‘비연속적, 불연속적 관계들을 현실화’ 하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특정한 (비슷한 형태로 밀접한 관련을 맺는)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서 

보는 이의 심리적 기제를 완벽하게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씬은 히치콕이 추구했던 케이크 조각과 훨씬 밀접한 관련이 있다.


 베르토프의 영화에서는 보는 이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순간들이

굉장히 많다. 낯설고 어색하기보다는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는 베르토프가 추구했던 담론과는 괴리를 보인다.

물론 베르토프 영화에서도 담론과 합치하는 순간들도

보이지만 이런 낯익은(?) 순간들이 더욱 많다.

결국 베르토프 역시 자신의 담론만큼 영화적 성취를 보이지

못했다. 에이젠슈타인처럼 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co_cine_scene&wr_id=204240&sfl=mb_id%2C1&stx=unhallowed이 글을 참고 )


 에이젠슈타인과 베르토프가 자신의 담론과 괴리를 보이는

영화들을 보인 것은 특정한 이미지를 주기적으로 반복하지 않고는 보는 이의 흥미를 제대로 끌 수 없는

유럽 무성 몽타주 영화의 태생적 한계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영화가 그리된 것은 신념이나 태도의 문제(게으름이나 섣부른 타협)이 아니라

‘도구’ 자체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나중에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쓰기로 한다.)


 존 카사베츠와 장 뤽 고다르에게는 그러한 도구(한계를 극복할) 들이

있었다. 비록 그들은 베르토프처럼 담론을 체계화하지는 못했지만 베르토프가 추구했던

'숏의 연쇄에 개재되는 심리적 기제를 차단하고 그 에너지를 물질의 생산적 흐름으로 유도할 방법’을

누구보다 잘 보였다. 그 도구들 중 하나가 사운드의 활용이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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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S 컷과송  
글이 예상보다 짧아서 당황했지만, 2부에서 제목에 걸맞는 내용이 있을거라 기대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
언젠가 이 글이 바쟁에게까지 이르겠군요.
1 타바스  
2부는 오늘 안에 올릴 겁니다.
존 카사베츠와 고다르는 강력한 툴이 워낙 많은 감독들이라서 앞으로 계속 연재(?)할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