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타임(2017) - 조쉬 샤프디, 베니 샤프디

영화이야기

굿타임(2017) - 조쉬 샤프디, 베니 샤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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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한 얼마 되지 않아 (베니 사프디)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보여준다. 그의 눈에는 초점이 부재한다. 그는 아무것도 응시하지 않거나, 본인 말고는 아무도 없는 곳을 응시한다(코니가 닉에게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었을 아무것도라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 전자일 것이다). 그를 진단하는 정신과 의사 피터와의 대화에서 그가 무능해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관습적으로 통용되는 관용어들을 하나도 파악하지 못하는 그의 상태를 지표하는 것은흐리멍텅한 이다. 뿐만 아니라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코니 역시 마찬가지다. 코니와 닉이 함께 훔친 돈은 붉은 연기탄으로 그의 시야를 가린다. 감옥에 갇힌 닉을 꺼내오기 위해서 그가 병원에 잠입했을 때도 그는감시자 인해서 곁눈질 하거나 몰래 밖에 없게 된다. 결국 왜곡된 시야 혹은 차단된 시야가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코니가 닉으로 착각해 병원에서 탈출시킨 범죄자 래이는 등장부터 눈을 감은 기절한 인물로 그려지고 그나마도 깨어났을 눈두덩이가 부어있어 어디를 응시하는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에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어떠한가.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무엇을 찾는지 정확히알고 있는카메라는 넓은 뉴욕에서 마치 유도미사일처럼 빗나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진 트랙 업하며 닉을 찾아낸다. 이어지는 쇼트에서 닉의 눈을 포착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앞서 말한 닉의 상태를 서술함과 동시에 정상과 비정상을 즉각적으로 판별하는 규율사회의 눈으로 기능한다. 얼굴의 절반 밖에 보이지 않던 닉을 카메라가 줌아웃하면서 그의 얼굴을 정확히 프레이밍 시킬 , 이것은 범인(혹은 정신이상자를) 식별하기 위해 구금 과정에서 촬영하는 얼굴 사진인 머그샷을 환기시킨다. 머그샷이 가진 의의는 분명하다. ‘여기 비정상적인 사람을 보라’. 또한 코니가 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든 쇼트는 마치 도주하는 범인을 쫓는 경찰헬리콥터의 위치에서 바라본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의 눈과 인물들의 눈이 갖는 이러한 비대칭성(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인물들과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카메라) 권력구조를 공고히 한다. 따라서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는 들뢰즈가 말하는 것처럼내적 눈에서 외적 감시로 이르는 연속체가 되는 ’. 다시 말해 카메라가 가진 권력을 내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 푸코가 적확한 언어로 명명하면서까지 이해하고자 했던, 그리고 이해를 바탕으로 추방하려고 했을 구조를 가진 카메라를 샤프디 형제들은 전경화시켰는가?


질문에 답하기 전에 닉과 코니가 활동하는 디제시스 세계가, 구체적으로 그들이 자의적으로 이탈하거나 타의적으로 배척되는 장소이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이한 점은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 그러니까 거주할만한 공간이 언급되지 않는다. 코니가 꿈꾸는 환상은 지금-여기와 동떨어져 있는 바깥의 장소/시간에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특히 코니)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그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킬만한 고향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국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다. 일반적인 케이퍼무비들과 다르게 그들에겐 은행강도를 실행하기 , 계획을 꾸릴만한 어떤 공간도 없다. 그들에겐 계획할 시간이 없고 계획할 공간이 없으며 일이 잘못 되었을 수습할 있는 예비책도 없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있을 것이다. 유토피아를 꿈꾸던 이들이 일탈의 헤테로토피아1) 들어가 교화되는 이야기라고. 정상이라는 범주를 벗어날 있는 방법은 없다. 꿈을 권리는 있지만 그것을 실행할 있는 권리는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겐 각자의 문제에 맞는 해결책이 있고 해결책은 사회가 제시해줄 것이다. 예컨대 교도소에 가게 닉은 결국 병원을 거쳐 다시 정신 치료를 받으러 처음의 그곳으로 돌아간다. 닉이 결국 교도소로 가게 되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여정이다. 교도소는 그가 여기 있으면 된다고 판단한다. 병원은 치료가 끝나면 이상 머무를 없다. 그에게 적합한 공간은 오직 정신치료를 받을 있는 정신병원 뿐이다. 카메라는 그런 그들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앞서 말한 내면화된 구조를 상영함으로써 지속적으로 강화시킨다.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영화는 상영되어야 하는가? 질문을 대답하고 카메라의 구조를 전복시키는 하나의 시퀀스가 있다. 그것은 코니의 응시이다. 공고히 다져진 구조에 흠집을 내는 응시는 관객으로 하여금 디제시스 세계를 빠져나오게 한다. 크리스티앙 메츠가 말한 , 관객이 영화를 뿐만 아니라 돕는다는 것이 역전되는 원인으로서의 응시이다. 객관적 쇼트 다음에 나올 시점쇼트가 디제시스 세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응시를 통해서 우리의 세계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쇼트의 봉합은 깨지고 우리의 세계와 연결된다. 마주 봄이 구조의 지반을 흔들고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것은 세계의 문제를 우리 세계에 떠넘기는 전복적인 행위이다. 그는 카메라와 반대로 묻는다. ‘여기 비정상적인 세계를 보라.’


1) 푸코가 정의한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유토피아.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그것들을 지우고 정화시키고 중화시키는 일종의 반공간이다. 그는 헤테로토피아를 계보학적으로 살펴보면서 생물학적 위기를 겪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겪는 청소년, 여성, 아이를 위한 위기의 헤테로토피아(그들만 사용할 있는 공간들) 사라지고 일탈의 헤테로토피아(요양소, 정신병원, 감옥) 자리를 대체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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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26 장곡  
자세한 설명으로 보아 대단한 매니아시네요.
S 컷과송  
문해력과 영화에의 공부가 미천하여 님의 논지를 전반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성 들여 작성하신 글을 감내하지 못함이 부끄럽네요.
1 yvonnemarmelle  
아닙니다. 어설프게 이해항 개념을 여기저기 붙여써서 그런가봅니다. 제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썼으니 읽은 분들 역시 그렇겠지요. 그럼에도 답변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명확한 문장으로 써야한다는 사실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