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2021) -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이야기

드라이브 마이 카(2021) - 하마구치 류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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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편의 영화(해피아워와 우연과 상상)를 급하게 보았을 때 어렴풋이 느껴지던 것이,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본 후에 조금 선명해져서 내가 받은 인상을 조심스럽게 적어본다.


 에릭 로메르는 6편의 도덕 연작 중 5편을 찍은 후(1971), 필름 쿼털리의 기자 그레이엄 페트리와의 인터뷰 중에 나온 '시리즈의 연결고리는 두 여자 사이에서 주저하는 남자라는 개념인가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남자들은 사실 주저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그가 선택을 하고 마음 먹은 바로 그 순간, 다른 여자가 등장해버린 겁니다. 어떤 종류의 갈등도 실제로는 없고, 그런 상황은 남자의 선택을 확고하게 해줄 뿐이에요.’ 만약 하마구치 류스케가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이렇게 대답을 시작했을 것이다. ‘네. 남자 혹은 여자들은 주저하고 있어요.’


 나는 그의 인물들이 주저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주저함은 이것과 저것 사이를 선택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단단한 지반이 없어 닻을 내리지 못하는 배처럼 밀려오는 파도에 불안하게 흔들리는 방황의 이미지로 느껴진다. 왜 그렇게 느껴지는가? 류스케의 인물들 - 해피아워의 우카이의 이상한 행위예술과 노세의 소설, 우연과 상상의 세가와의 소설, 나나와 모카의 역할극이 그렇듯 - 은 예술, 혹은 예술처럼 보이는 행위를 경유하여 삶을 관찰한다. 어쩌면 관망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어떤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자의 절박함이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은유는 실재(로 추정되는 것)를 이중으로 은폐한다.


 유스케가 기획하는 연극은, 그렇기에 진실을 직면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회피처럼 느껴진다. 그는 자신과 아내에 슬픔에, 아내의 부정에,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자신의 고통에, 사건의 틈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감정에 도망치는 것에 익숙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가 연극에 외국어를 삽입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삽입함으로써 본래 이해할 수 있는 것까지 한데 묶어 이해불가능으로 정의해버리려는 것이 아닐까? 더 나아가 그는 진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것은 아닐까? 바꿔말하면 진실이 깊숙한 곳에 파묻혀있어 우리가 가진 도구로는 도달할 수 없거나 겨우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한 진실이 그 자리에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파헤치려는 시도도차 회피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문제를 풀이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문제를 복잡하게 변형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영화는 기표를 걷어내는 대신 너무 많은 기표를 덧붙인다. 섹스 후에 이야기를 쏟아내는 아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녀의 행동을 통사론 안으로 밀어넣음으로써 구조화시킨다. 그녀의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묻는 대신에 다음 이야기가 언제, 어디에서 나오는지 귀 귀울인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인 차 안에서의 고백 시퀀스에서 코지가 오토와의 외도를 어떤 방식으로 유스케에게 전달하는지 보면 이 세계가 얼마나 코드화되어있는지 알 수 있다. 유스케가 코지에게 아내는 섹스 ‘후에’ 이야기를 쏟아낸다고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는 완결되지 않은 토막이므로 다음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행위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유스케가 코지에게 이번에 아내가 새롭게 시작한 이야기의 결말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자, 코지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 코지는 내가 당신의 아내와 잤다, 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는 그 다음 이야기를 알고 있다, 라고 말한다. 그들은 메세지를 코드화하는 방식으로만 겨우 소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스케가 드라이버 미사키에게 건네는 위로는 의심할 여지가 있다. 그 위로는 ‘만약에 딸이 살아있었으면 같은 나이였을’ 미사키가 ‘자신이 아내를 잃은 것처럼 어머니를 잃어 같은 고통을 공유하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할 수 있는 순환논증처럼 보인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이겨내고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스케와 미사키가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금지된 공간에서 피우는 담배를 한 프레임 안에서 잡는 것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그의 위로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위로가 두 번 반복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유스케가 눈물을 흘리며 미사키를 안고 위로하는 장면을 연극을 통해 다시 반복한다. 이 반복이 앞의 행위를 기만으로 만든다. 삶에서 말해진 것이 충분치 않기에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 한번 더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장면은 거울의 반사상처럼 유스케가 위로받는 입장으로 그려진다. 그것도 자신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수화를 통해서, 관객들이 지켜보는 순간에. 이 장면에 목격자가 필요한 것처럼.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유스케가 가장 좋아하는 차와 무뚝뚝한 미사키가 유일하게 관심을 주는 윤수와 유나의 개를 차에 태우고 한국에서 드라이브를 하고 있다. 이 이미지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 어떤 의미도 생산하지 못하는 기표들의 구조물이다. 왜냐하면 인물과 사물이 어떻게 그 장소에 갔는가, 에 대한 대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너무 많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오로지 기표와 기표의 연결을 통해서 임의적으로 의미를 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유스케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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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omments
이 영화를 여러 번 보면서 처음에 가졌던 놀라움이 사라졌습니다. 처음 관람 때에는 훌륭한 각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거듭 보면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영화 속에 집어 넣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서사를 이끌어가는 수많은 장식으로 전체 골조가 휘어진다고 할까요. 몇몇 연출은 훌륭하긴 합니다만, ‘나는 이런 쇼트를 찍을 수 있어’하고 과시하는 느낌마저 드는 장면도 있고 어떤 것은 지나치게 상투적입니다. 서사가 복잡해지니 러닝타임이 늘어나고 연출의 전체적 균형도 흔들리는 느낌마저 듭니다.
아직까지 하마구치는 영화를 머리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지 모르겠지요. 잘 만든 영화일 수 있지만 이게 그렇게 상찬할 걸작일까하는 의문이 드는게 최근 심정입니다.
1 yvonnemarmelle  
저는 한번 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영화의 훌륭함을 판단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합니다만, 여타 글들을 읽어보니 획일화돤 방향으로 해석되는거 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에 부족하나마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스미시계있고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부디 좋은 글 많이 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S 컷과송  
오! 여기로 답변주셨군요...감사합니다. 이제 출력해서 읽을 수 있겠군요...글에 대한 첨언은 일독 이후에 하겠습니다.
다른 글들도 여기에 올려주시면 읽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의 예의바른 다양한 말씀은 항시 즐겁네요.
1 yvonnemarmelle  
부끄러움이 많아서 차마 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나마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S 컷과송  
글 잘 읽었습니다. '주저'의 지반에서 얼핏 불가지의 쾌감으로 도피한다는 인상을 받게됩니다.
글 후반부로 갈수록 포스트 모던의 전능성과 6,70년대 영화 이론사의 기호학이 어른거리기도 합니다.
물론, 이같은 시야가 본편에 대한 기존 품평들의 일률성과는 노선을 달리한다는 측면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님의 다른 영화글들도 보고싶은데, 역시 노안이라 SNS에서는 쉽지 않네요. 앞으로도 가능하면 가끔 여기에 글 실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