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후반부 장면 질문 하나

영화이야기

<동경의 황혼, 1957>의 후반부 장면 질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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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오즈의 영화 몇 편 보다가, 그 중 <동경의 황혼>의 후반부에서 궁금한 장면이 하나 있어 질문드립니다.

영화는 오즈의 걸작들이라 불리는 영화들과는 달리, 꽤나 다른 관점에서 50년대를 묘사하는 거 같습니다.
오즈 영화를 다 보진 않았지만, 그의 영화는, 기차나 (심지어) 공장굴뚝, 근대 건축, 근대시설 등의 근대화,

산업화된 공간의 묘사와 찬양 그리고 그것을 관장하는 전통적 부성애를 그린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것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것은 물론 류치슈이고요. (심지어 류치슈는 오즈 감독 이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근데, 이 영화에서의 "기차"의 묘사는 대단히 이례적입니다. 영화는 어두운 밤, 황혼, 기차의 이동으로 첫 쇼트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아키코의 시선으로 전개되는데, 기차는 언제나 그녀를 쫓아다닙니다. 철도 건널목은 대단히 건조히 묘사되고,

"위험, 고압볼트"라는 표지판은 훗날 아키코의 사고에 대한 불안한 복선이 됩니다. 도박장, 산부인과, 술집을 오가는 그녀의

이동방향은 언제나 예의 오즈 특유의 설정샷으로서의 기차가 그녀를 쫓습니다. 아니 실은, 그녀보다 기차가 언제나 먼저

도착해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끝내 기차에 치여 죽습니다. 친엄마가 가족과 이별하는 공간 역시 기차역 입니다.



제가 궁금한 건, 후반부에서 친엄마가 기차 실내에서 딸 하라세츠코를 기다리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엄마의 심리를 꽤나

상세히 보여주는 장면인데, 물론 오즈 특유의 실내와 실외를 오가는 빼어난 공간 연출로서 묘사됩니다. 이 장면의 쇼트를 몇 개 살펴보면...

설정샷들인 시계샷과 12번플래폼샷이 안내방송과 함께 연달아 붙습니다. 그리고 3번째 샷은 플래폼의 모습을 3인칭샷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는 카메라는 실내 기차 안으로 들어옵니다. 친엄마와 그의 남자가 있습니다. 안내방송이 그치고, 외화면의 어떤 구호소리에 이어

교가(?)가 내화면으로 들립니다. 카메라는 실외로 나가서 친엄마가 딸 하라세츠코를 애타게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보는 쇼트로 이어집니다.

카메라는 3번째샷과 똑같은 구도와 앵글로서 플래폼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친엄마의 샷이 다시 붙고는, 노래소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그녀의 시점샷을 보여줍니다. 이때의 시점샷은 3번째샷과 여전히 같은 구도와 앵글이지만, 시점샷이기에 약간 더 큰 사이즈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씬 내내 이어지던 그 노래소리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그건 바로 한무리의 메이지대학 학생들이였습니다 (위의 첨부한 마지막 스틸컷).

거대한 교기 아래, 세 학생은 고개를 숙이고 있고, 나머지 학생들은 오른손을 위아래로 휘두르며 (군가같은) 교가(?)를 우렁차게 열심히 부릅니다.

그리고 몇 개의 숏이 지나간 후, 그 교가와 함께 씬이 끝납니다 (이후의 에필로그는, 기차는 역할을 다했다는 듯 영화에서 사라지고, 류치슈의

세계로의 통합으로 영화를 마무리 합니다).


제게 이 장면은 꽤나 중요한 장면 같습니다. 우선, 아키코는 기차에 치여 죽습니다. 기차역에서 친엄마는 아키코에 대한 미안함과

딸 하라세츠코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그러나 하라세츠코는 끝내 류치슈로 대변되는 아버지의 세계로 역시나 편입합니다. 말하자면

이 장면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감정과 사건들이 교차하는 기차역이라는 공간에서, 하라세츠코가 친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갈피를

못잡는 그 분기점에서, "메이지 학생들"이 느닷없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스크린 밖은, 일본 경제성장의 시작이자 정치적으로는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의 50년대 한복판입니다.

어쨋든 말이 길었는데, 제 질문의 요지는, 이 장면에서 "맥락없이 삽입된 '메이지 학생들'이 하는 행위는 무엇인가", 입니다. (쉽게말해,

왜 뜬금없이 저 학생들이 나왔고, 저 학생들이 하는 행위는 무었이냐,인 것이 질문입니다) 한무리의 학생들이 플래폼에 모여 노래를

부른다는 건 분명, 영화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일상적인 플래폼에서의 모습과는 다른 장면일 것입니다. 오즈는 그걸 굳이 집어넣었습니다

(그 전 씬에서 길 잃은 개 한 마리가 류치슈의 집 앞 전봇대에 오줌을 갈기는 모습 역시 의도적인 삽입인 것처럼요).

친엄마가 기대하는 하라세츠코를 대신하여 감독은 그들 남학생들 무리를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친엄마의 기대는 학생들로 인해 어긋난

셈이 됩니다. 당연히 감독의 의도적인 장면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의 의미는, 영화 전체를 해석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것으로

생각됩니다. 영화 속 학생들은, 오른쪽 3명의 학생들을 어딘가로 떠나보내는, 송별회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짱구를 굴려 자문자답해본

몇가지는 :

1. 자위대 입대하는 세 학생의 송별회이다 2. 유학가는 세 친구를 환송하는 것이다. 3. 전국 대학생배 마작대회 학교대표 선수들을

환송하는 것이다. 4. 하네다 공항을 점거하러가는 신좌익들을 환송하는 것이다. 5. 기타이유다.

오즈의 다른 영화들에서의 예의 그 쇼트들과 편집들은 다 해석이 되지만,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의 의미, 감독의 의도는 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오즈 관련해서 책 한번 읽어본 적도 없고,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없기에 여기에 질문을 남겨봅니다. 오즈를 무척 안좋아하긴 하지만,

<외아들>과 <오하요> 그리고 이 영화 <동경의 황혼>이 무척 맘에 들어 하는 진솔한 질문이니, 혹시 아시는 분 답변 부탁 드립니다.




ps. Eiko Miyoshi!! 최고의 배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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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Comments
S 컷과송  
지금 당장은 오래전 감상한 이 영화의 이 장면에 대해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재견하는 시점에 님의 이 지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성찰의 지점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블로거 중에 오즈 관련 책을 내신 분 https://blog.naver.com/archona121 님에게 질문을 하시면 답변을 받으실 수 있을 듯 합니다.
국내 출간된 오즈 곤련 서적을 다시 한번 펼쳐보겠습니다. 오즈 자서전은 제외하고요.
13 리시츠키  
<동경이 황혼>은 기존 자신의 걸작(?) 영화들에 대한,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들에 가하는 비판적 텍스트로서의 영화인가,
라는 생각으로 영화 내내 보았드랬죠.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에필로그에서 또 류치슈를 등장시켜 예의 그 세계로 봉합하더라구요)

암튼 그런 생각으로 영화 내내 감상하다가, 기차역에서 친엄마가 딸 하라세츠코를 못만나게하는건 좋은데,
그 장면에서 친엄마의 애타는 기대로서의 시점샷을 오즈는 왜 메이지대학생들을 보여줌으로서 기대를 저버리는가, 하는 괜한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영화 속 주인공 아키코는 대학교를 중퇴했고, 남친 대학생은 그녀를 임신시켜놓고 도망다니고있고,
주변의 대학생 친구들은 매일 마작으로 소일하며 아키코에 대한 임신 소문을 퍼뜨리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렇듯 영화 속 "대학생"이라는 신분의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의 플롯을 추동시킵니다.
또한 아시다시피, 5060년대 일본 대학생들이란, 가장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세대들이였으니까요.
그렇기에 친엄마의 시점샷으로 보이는 "메이지대학 학생들"이란, 영화의 중요한 해석의 키를 담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누구이고 지금 기차타고 어디로 가는가'라는게 궁금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무엇을 안다한들, 걍 제 과잉해석만 강화할뿐 그냥 부질없는거 같네요.
그냥 친엄마의 애타는 감정과 대학생무리들의 환송식(혹은 송별식). 그것의 병치, 충돌 혹은 매치컷.
내화면과 외화면, 사운드. 감정의 충만함과 공간들. 역시 오즈는 대단하구나. 그냥 이러면 될거 같아요.

암튼 좋은 영화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 소년독본  
참고가 될지 모르겠지만 국내 출간된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 '오즈 야스지로> 에 오즈가 간단하게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동경의 황혼> 부분을 보면
 "나로서는 오히려 류 지슈 씨의 인생 - 아내가 떠나버린 남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나이 든 세대쪽에 중심을 두고 만든 것입니다. 젊은 세대는 말하자면 그것을 돋보이게 하는 들러리 역활인 것인데"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13 리시츠키  
"아내가 떠나버린 남자"라는 언급에, 방점은 남자(류 지슈)에게 있는것이겠지요.

딸의 시선으로 영화 내내 이야기가 전개되어 기어이 딸은 비극적으로 죽고,
하라세츠코는 리액션숏으로서 격렬한 감정의 울음으로 친엄마를 떠나보내고,
결국 친엄마 마저 '대학생들의 교가(?)'에 막혀 어리둥절하여 떠나게 되는데,

제게 인용하신 오즈의 저 발언은 대단히 이상하게 들립니다.
오히려 저 언급은 영화의 인물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즈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말하는거 같습니다.

재미난 인터뷰 글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 소년독본  
제가 앞의 발언은 발췌를 한거라 문맥이 좀 이상하긴 합니다.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것은 젊은 여자의 무궤도적인 삶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고들 이야기하는데 나로서는 오히려 류 지슈 씨의 인생 - 아내가 떠나버린 남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나이 든 세대쪽에 중심을 두고 만든 것입니다. 젊은 세대는 말하자면 그것을 돋보이게 하는 들러리 역활인 것인데, 아무래도 일반 사람들은 그 겉장식 쪽에 눈이 가버렸던 모양입니다"
다른 작품들에 대한 코멘트와는 좀 다른 방식의 언급이긴합니다. 오즈는 확실히 자신의 작품이 오독되는 것에 신경쓰였던거 같고요 리시츠키님 말대로 이 코멘트를 보면 오즈 야스지로라는 한 인간의 일면이 보여서 흥미로웠습니다.
S 컷과송  
답변이 늦어 이 글을 확인하실 지 모르겠으나, 위 댓글의 약속을 이제서야 지키려합니다.
오늘 15년만에 다시 본편을 감상하니, 님의 질문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일 수 있었습니다.

우선, 본편과 전작 <이른 봄>이 오즈의 30년대 인장들의 회귀라는 점이 중요하지만,
그것은 님의 질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니 생략하겠습니다.
더불어 후기 오즈에게 있어 겨울이라는 계절적 위치도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본편에서 사운드는 이중적으로 사용되는데, 이는 디제시스 내외부 어디에서 유래되는지보다는
그것의 쓰임이 본편 서사를 이유없이 방해하는 데 있다는 지점에서 모더니즘적입니다.
이른바 소음으로 기능함으로서 본편의 세계 내 평면성을 파괴하는 데 여러 사운드가 돌출됩니다.

그 중 님의 질문에서 언급된 결말부 기차역의 합창은 전작 <이른 봄>에서의 송별회 노래와도
연결될 수 있지만, 전작에서의 그것이 극중 주인공의 지인들의 합창이라는 직접성이 있다면
본편의 노래는 관련성이 없는 별개 집단의 노래라는 점에서 이질적입니다.
그러므로, 기차역 합창은 표층적으로 딸의 송별을 대신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방해하는
타자적 대리성으로서 친모의 떠남을 축복하지 않는다는 모순성을 드러냅니다.

변변찮은 상상이라 답변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님이 다시 영화감상평 게시판에 복귀하시기를 기다리며 약속 이행합니다.
13 리시츠키  
컷송님 말씀처럼, 오즈의 미장센은 어딜봐도 탁월합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다만 그것의 함의는, 소년독본님이 친절히 인용해주신 오즈의 인터뷰에 다 담겨있는거 같습니다. 오즈의 인터뷰를 보면, 류치슈, 즉 아내가 떠나버린 남자, 나이든 세대라는 것과 / 젊은 세대, 들러리라는 것. 이렇다면, 아키코와 학생들을, 나아가 엄마와 하라 세츠코까지 유비관계로 묶는다면, 의도는 명확하다고 봅니다. 이후, 엄마와 하라 세츠코를 분리하는 것은 류치슈, 즉 오즈일 것이고요. 이렇게 서사를 통합하는 것이고요. 이게 저 인터뷰의 액면인거 같구요.

그리고 제가 궁금했던 저 학생들, 설명이 안되기에 오히려 영화 속 구명이, 얼룩이 되는거 같습니다. 컷송님이 지적하셨듯 그 이질성이라는 것, 단 "한 컷"으로만 등장하는 오즈의 저 들러리 학생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즈가 통합한 저 서사에 구멍을 내는 것이고요. 오즈의 영화들 중 <동경의 황혼>이 흥미로운 것은, 다른 그의 영화들과는 달리, 구체적인 현실의 맥락이 삽입되었다는 것인데요 -특히 대학생들을 통해서요- 그건 어쩔 수 없이 일본의 50-60년대와 관련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 학생들은,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나태하고 무책임하기도 하겠지만, 나태하지도 않고 무책임하지도 않았죠. 아키코처럼 내면적인 아픔을 가진 자들도 있었겠구요. 당시의 일본에서의 학생운동이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세대 싸움이기도 했으니까요. 뭐 사실 같은 말이지만요. 결국, 전후 일본의 학생운동이 그렇게 전개되듯, 단 한 컷 나오는 저 학생들의 합창은 후반부까지 외화면을 통해서 연속되지만, 기적소리와 함께 시퀀스가 끝나버리죠. 암튼 횡설수설 죄송합니다. 컷송님 댓글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S 컷과송  
잠시라도 돌아오셨군요. 구멍-얼룩론과 세대, 사회성에 대한 지적은 오즈 세계를 응시할 때 반드시 필요한 지점이기 때문에 적절합니다.
제 시선은 지나치게 옹졸하며 오즈의 작품을 차례로 감상하는 여정에서 필연적으로 독출되는 단견에 불과합니다.
본편 뿐 아니라, 오즈가 극내외에서 사운드를 사용하는 방식에 주목한 것이라 시야가 제한된 측면이 있네요.
여튼 귀환하셔서 즐겁네요. 다시 좋은 글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