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 부국제 최고 작품을 선정해봤습니다.

영화이야기

올 해 부국제 최고 작품을 선정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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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돌아오는 부국제이지만 이 번에는 과욕을 부렸습니다. 연가까지 사용하며 무리하게 일정을 잡아 본 영화가 스물한 편입니다. 사실 이런 짓은 미친 것입니다. 건강상에도 안 좋을 뿐더러도 무엇보다 영화를 한꺼번에 이런 식으로 본다는 것은 남는 게 하나도 없는 짓거리지요. 영화제 때 가장 지혜롭게 보는 편 수는 제 생각에 일곱, 여덟 편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스물, 서른 편 보다는 것은 소화도 되지 않은 상태에 음식을 식도로 집어 넣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대식가 중에 미식가가 없다는 말은 영화 관람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영화로 업을 삼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정한석 평론가랑 예전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영화제에서 영화를 너무 많이 보다가 오판한 적이 없냐라고 물어 본 기억이 납니다. 정 평론가는 '왜 없겠냐? 두기봉 감독의 영화를 지친 상태에서 보다가 혹평을 한 적이 있는데 다시 보니 걸작이더라'라고 답을 하더군요. 영화와 영화 사이를 누비며 정리되지 않은 감상 속에서 우리는 쉽게 열광하고 쉽게 비난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 영화를 보고 마음 속으로 흡수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영화제를 돌아다니다 보면 자신이 영화를 많이 본 것에 우쭐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른에서 마흔 편 가까이를 봤다고 자랑을 하지요. 그럴 때마다 속으로 '야.. 이 등신아~ 그건 너가 머저리래서 그 짓을 하는거야'하고 혀를 찹니다. 그런데 올 해는 제가 그 등신과 머저리 짓을 했네요.


충분히 체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그동안의 제 영화 체험입니다. 부국제에서 제게 올 해 최고작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입니다. 영화적 체험상 이 영화는 압도적 걸작이었습니다. 그 이야기에 앞서 우선 태국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에 대한 별 중요하지 않는 이야기부터 먼저 꺼내놓겠습니다.


아피찻퐁이 한국에 자주 오다보니 그를 직접 만난 사람들의 경험은 널려있습니다. 제가 들은 제일 재밌었던 건 주진숙 교수의 경험담이었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인가에 일이 있어서 시외버스를 타고 내려가는데 옆 자리에 외국인 남자가 탔는데 잠시 후 피곤해 절어 잠이 들더니 자꾸 주교수 어깨에 기대더랍니다. 깨울까 말까하고 고민을 하다가 쳐다보니 너무 맑고 순수한 아이처럼 잠이 들어서 내버려뒀다네요. 그 긴 시간을 말입니다. 나중에 눈을 떴을 때 별빛이 부서지듯이 아름다운 눈망울을 가진 이 남자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사람이 바로 데뷔작을 들고 나타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었다고 합니다.

 

별빛이 부서지듯이 아름다운 눈망울을 가진 남자. 그 눈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제게 기회가 왔습니다. 2011년 부국제 까이에 뒤 시네마 포럼에 참가했을 때입니다. 제가 앞 좌석 첫줄에 앉았는데 옆에 자그마한 남자가 앉더군요. 무심결에 한 번 쓰윽쳐다보니 아피찻퐁이었습니다. 뭔가 글을 읽고 있었는데 그의 팔을 톡톡치며 실례지만 사인을 해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저를 정면으로 쳐다 본 그의 눈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반짝이는 것을 넘어서 눈망울이 연주를 하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사방이 조용해지면 눈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아피찻퐁은 큰 미소로 대답하며 사인을 해줬고 같이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지만, 아피찻퐁임을 눈치 챈 객석의 사람들이 마구 몰려들어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메모리아>는 이 번 부국제에서 세 차례 상영되었습니다. 먼저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아피찻퐁 영화답게 느리고 지루해서 사람들이 졸다가 휴대폰을 많이 떨어뜨린다는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저 역시 앞의 영화들 때문에 피곤했는지라 에스프레소 커피를 연거푸 두 잔이나 마시고 영화관에 입장을 했습니다.

<메모리아>는 커피의 각성 효과가 필요없는 걸작이었습니다. 상투적인 의미에서 걸작이 아니라 엄청난 걸작이었습니다. 이 영화 앞에 하마구치 류스케도, 안드레아 아놀드도, 마르코 벨로치오도, 제인 캠피온도 다른 제가 본 여타 감독의 영화들은 일시에 초라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느린 롱테이크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아는 하나마나 한 이야기입니다. 아피찻퐁의 영화를 볼 때 눈보다 귀에 더 신경을 쓰야 합니다. 아피찻퐁 영화의 사운드야 말로 영화적 체험이입니다. 그것은 정글의 사운드이자 사운드의 정글이라 할 수 있는 미지의 사운드입니다. 그의 영화를 아무 생각없이 보다보면 어느 순간에 잠에 빠져듭니다. 하지만 그 잠에 빠져들게 하는 소리들.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에 주목하면 영화에 심어놓은 사운드가 얼마나 신비한지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여주인공 틸다 스윈톤이 콜롬비아에서 자신만 듣게 되는 소음과 관련된 이야기이니 소재부터 소리인 영화입니다. 밤에 틸다에게 쿵하고 들려오는 소리. 다른 사람은 못 듣지만 자신만 들리는 소음. 그 소음의 정체를 찾아 헤매다가 이상한 경험을 하게된다는 내용입니다. 이 세계가 우리의 기억을 모두 다 담고 있는 기억장치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각자의 아픔이 서로 다 공유될 수 있다면 어떤 상황이 되겠는가? 아피찻퐁의 영화는 늘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이런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화를 보면 내용인지 헤매고 졸다가 나오기 쉽상이지요.

영화 후반에 깜짝 놀랄만한 엄청난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장면보다 훨씬 아름답고 명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메모리아>는 진정한 의미에서 21세기 유성영화의 출발이며 아피찻퐁은 제 아무리 큰 스크린을 준비해도 화면이 모자란 비범한 능력의 감독입니다. 그의 영화의 확장성은 우주를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빗소리가 들립니다. 빗소리가 우리의 영혼을 축축하게 만들고 난 뒤 갑자기 치지직하고 안테나 교신 소리 들리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그 때 제가 본 것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별빛이 부서지는 듯한 눈망울이었습니다. <메모리아>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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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Comments
21 Cineaste비정규직  
읽어갑니다 출시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게 더욱 아쉽네요
종종 영화제 기간에 큰 포맷으로로 아트하우스 영화를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리입니다. 이 영화는 영화의 전당 중극장에서 볼 수 있어서 더 좋았네요. 시녜마테크에서 보면 어땠을지 모르겠네요
12 왓쪄네임  
100% 공감되는 글입니다
영화를 보셨나보네요. 같은 영화로 감동을 느낄 수 있어서 반갑네요^^
1 omega13  
저도 무척 좋았던 작품입니다. 열대병이나 친애하는당신이나 엉클분미나 도중 뜬금없이 나왔던 노래가 가져오는 아름다운 이질감을 이번에도 기대했는데(찬란함의 무덤에서는 국내 뮤지션인 디제이소울스케이프의 love is a song 이었죠) 이번에는 화음 없는 소리 단순한 소리만 가지고도 엔딩크레딧을 끝까지 부여 잡는 힘에 탄복했습니다. 역시 영화가 나갈 수 있는 무궁무진한 방향을 보여주는 멋진 감독이라 생각됩니다.
개울의 물소리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개울가 남자와 나누는 대사도 아름다웠고요. <메모리아>에서 기억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영화에 대한 은유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틸다 스윈톤이 남자의 집에서 창 밖을 볼 때 그 창이 영화의 스크린처럼 느껴졌습니다. 잊지 못할 아름다운 장면이었어요.
2 도토리쿵쿵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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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암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름 외우는데만 10년 걸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사티야지트 레이"와 함께 가장 이름 외우기 힘든 감독..
이감독님은 10여년전 <엉클 분미>가 칸 대상을 받고 나서 찾아봤었죠..
이건 뭥미???  여태껏 봐온 영화와는 180도 다른 신개념 영화였습니다...
물론 지루함은 덤이구요...
내가 정글체험을 하는듯한 그 생생한 정글의 풀벌레소리..칠흙같은 밤... 느닷없는 정글귀신...
참 기이하고도 인상깊은 영화체험이었습니다...
그 후 이 감독의 소위 유명한 전작들은 시간날때 찾아봤었는데요..
<정오의 낯선 물체><친애하는 당신><열대병><징후와 세기> 등을 찾아봤는데 엉클 분미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게 아니더만유...
정글과 귀신...관객의 대리 정글체험이 그의 영화를 관통하고 있었습니다...오죽하면 정성일 평론가던가 그의 정글 미장센을 찬미하면서 "미장정글"이라했을까요?
그후 그의 영화보기는 뜸했습니다...
2010년대 그의 영화는 <찬란함의 무덤> 한편 보고 <메콩호텔>은 볼 기회가 있었지만 호텔에 또 귀신나온다길래 패쑤했던 기억이...
감독은 태국에서 영화찍기를 그만하겠다 선언하고 찍은 것이 이번 작품이네요..외국배우들로 콜롬비아 정글에 가서 찍은갑네요...
영화감별사 하스미님의 추천작이니만큼 향 후 꼭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합니다...
저도 한 번 더 보고 싶은데 영화제 때처럼 큰 극장은 불가능 할 것 같네요
참조로 최근 한국어 표기로는 시옷이 뒤에 붙더군요. '아핏차퐁'이 아니라 '아피찻퐁'. 태국 발음도 후자에 더 가깝습니다.
1 이브챔프  
저는 이것에 동의합니다.
1 haha1234  
재미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