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스크린으로 봐야 하는 영화

영화이야기

반드시 스크린으로 봐야 하는 영화

15 하스미시계있고 4 1645 5

모든 영화를 영화관 스크린으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일 것입니다. 프랑스의 영화 감독 고다르가 어느 글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볼 때 위로 보는 시선과 TV 화면으로 영화를 볼 때 아래로 보는 시선은 분명 다르기에 같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이런 생각에 반박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스크린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미술관에서 원본 회화를 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죠. 영화는 이미 복제된 것이기에 미술관 회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품의 아우라가 애초에 없다는 논리지요.


이런 골치 아픈 이야기는 알아서 생각하기로 하고요. 제 경우에는 가능하면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려고 합니다. 이유는 DVD로 영화를 볼 경우 자꾸 영화를 멈추는 습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꼭 영화관에서 봐야만 되는 영화가 있습니다. 큰 화면이 주는 압도감이 그 영화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주는 영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찍어내는 아이맥스 영화 따위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런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영화의 전당 <씨네 스페셜 - 감정의 지도> 기획전에 상영되는 시드니 폴락의 <제레마이어 존슨>(1972)은 스크린으로 반드시 봐야 할 영화입니다.


시드니 폴락은 <추억>(73), <투씨>(1982), <하바나>(90) 같은 시시껄렁한 멜로 드라마를 주로 만드는 감독입니다. 별다른 재주나 색깔이 없는 사람인데 그의 경력 중에 가장 기이한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85)로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탄 것입니다. 덴마크의 여성 작가 카렌 디넨센의 뛰어난 원작을 역시 시시껄렁한 멜로로 만들었는데, 늘그막하게 우수에 차 있던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의 눈물 쌤을 자극해서 상을 낚아 챘습니다.


사실 폴락의 최고 영화는 <제레마이어 존슨>입니다. 그는 1971년에 샌포드 프로덕션이라는 영화사를 하나 세웁니다. 이 영화사에서 네 편의 영화를 만드는데 그 중 자신이 직접 만든 영화가 <제레마이어 존슨>입니다

폴락이 영화를 엉성하게 만들긴 하지만 의외로 풍경을 기가 막히게 잘 찍습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보신 분은 기억하겠지만 서사는 유치한데 화면이 정말 좋습니다. 한 마디로 움직이는 <내셔널 지오그라픽>을 찍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레마이어 존슨>은 서사와 화면이 둘 다 좋은 작품입니다. 여기에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안마당인 유타주의 산맥에서 영화를 촬영했으니까요. 영화 로케에 많은 역할을 수행 했던 것이죠(당시 레드포드의 집 부근에서 촬영되었고 나중에 유타주에서 그가 만든 선댄스 영화제도 열리게 됩니다).


이 영화는 19세기 중반 미국에 실존했던 제레마이어 존슨이라는 전설적인 인물을 다룹니다. 미국-멕시코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세속을 피해 산에서 밀렵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플랫 헤드족 인디언 여자를 아내로 두고 있었습니다. 산 속에서 평화롭게 생활을 하던 중, 오해가 생겨 크로우족 인디언과 대립을 하게되고 그들이 아내를 살해하자 보복으로 크로우족 250명을 학살한 사실로 유명하지요.

 

영화는 개봉되고 흥행에도 성공을 했습니다. 인디언 학살자를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예상 가능한 상투적 비평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한 복수극이나 인종주의적인 작품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자연을 제대로 찍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연을 찍는다는게 카메라만 들고 밖에서 돌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카메라가 자연을 하나의 캐릭터처럼 담을 수 있냐가 관건인 것이지요.

일단 이 영화는 눈을 잘 찍었습니다. 촬영 감독 듀크 칼라한이 찍은 흩날리는 눈은 훌륭하지만 바로 앞의 해인 1971년에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에서 빌모스 지그몬드가 촬영한 눈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마 앞으로도 눈 장면에 대해서는 이 영화를 능가할 수 있는 영화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이 영화는 눈보다는 눈이 만들어내는 그 적막함을 기가 막히게 담아냅니다. 아니 눈보다는 자연 속의 적막함이라는 말이 더 맞겠습니다. 계절이 바뀌는데 인간은 그냥 묵묵히 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생활해야 합니다. 그런 걸 찍다보니 시드니 폴락은 이 영화를 자신의 영화 중에 '무성영화'에 가까운 영화라는 말을 했습니다. 대사가 적은 편인데다 영어가 아닌 인디언 언어나 프랑스어가 나오기 때문이죠.

케빈 코스터너 감독의 서부극 <늑대와의 춤을>은 분명히 이 영화를 보고 만들었을 것입니다. <늑대와의 춤을>에도 주인공 남자는 전쟁에서 돌아 온 군인인데다 인디언 여자와 결혼하고 인디언 언어가 영화에 계속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방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 듯이 코스트너는 한심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탑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심사위원들이 죽지않고 그 때까지 살아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자연, 이 영화에서는 유타주의 산이 인간을 압도해버리기에 영화에서 대사가 점점 빠져나갑니다. 그 순간 폴락의 말처럼 영화는 기원으로 돌아가 무성영화가 되어버립니다. 이 기이한 영화적 체험을 더 밀고 나간 영화가 있다면 예르지 스콜리모브스키의 <특급 살인>(2010)일 것입니다. 미군에 잡혀서 고문을 당하던 남자(빈센트 갈로 역)가 탈출을 해서 눈 속을 미친 듯이 헤메는데 거기에는 언어가 필요 없습니다. 남자는 철저히 야생 동물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제르마이어 존슨>에서도 존슨은 문명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야생이 되어 갑니다. 그러다 그의 인디언 아내 스완이 곰처럼 더부룩한 그의 수염을 보고 면도를 하라고 권합니다. 영화에서는 이 면도가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면도라는 문명적 행위를 한 순간, 백인 무리들이 찾아오니까요. 그들에 의해 다시 영어를 사용하게 된 존슨은 그들의 부탁을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협곡에 빠져 있는 포장마차를 구출하려는 구조대입니다.


제레미아 존슨은 구조대원들을 이끌고 조난지역으로 가지만 크로우족의 신성 지역을 피해서 가려고 합니다. 이 지역을 침범한 것이 들키면 잔악한 크로우 족에게 해를 입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조대들은 구조 시간을 핑계로 돌아서 갈 수 없음을 주장하게 되고 결국 신성지역을 침범하게 됩니다.


이 장면들이 이 영화에서 압권입니다. 눈에 덮힌 크로우 족의 무덤을 말을 타고 유령처럼 조용히 통과하는 무리들을 정말 잘 찍었습니다. 조난지까지 구조대 안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신성 지역에 들어간 존슨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어 미친 듯이 집을 향해 말을 달립니다. 그때 존슨의 무기력함을 눈 덮인 광야에서 롱 쇼트로 표현됩니다. 죽을 힘을 다해 달리지만 그 속도는 눈덮인 대지에 갇힌 느낌입니다. 그를 가로막는 것은 화면을 채우는 거대한 산들의 쇼트입니다.

이때 이 산들이 하나의 성격을 가진 캐릭터처럼 보입니다. 자연을 찍는다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합니다.


게다가 영화 전체가 산을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처럼 찍혀 있습니다. 영화 초반 제레미아 존슨이 등장은 강을 타고 마을로 들어오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산 속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마을에서 구하고 곧 산으로 올라갑니다. 이 장면 이후로 그가 만나게 되는 것이 산을 오르는 하나의 관문처럼 느껴지도록 찍었습니다. 서사의 정점과 산의 정상이 크로우 족 신성지역이었다면 불길함을 느낀 제레미아 존슨이 말을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하자 서사도 존슨의 몰락으로 이어집니다. 영화의 서사와 산의 구조가 일치하게 되는 것이지요.


<제레마이어 존슨>은 자연을 내러티브와 연결해서 어떻게 찍을 수 있는가에 대해 모범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자연의 웅장함은 반드시 스크린으로 봐야 합니다. 여건이 되시면 이번 기회에 놓치지 마시고 꼭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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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1 한노  
시드니 폴락의 최대 업적은 아이즈 와이드 셧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심하지 않은 영화..
14 Harrum  
흐름이 깊어 참 좋아하는 영화예요.
ㅎㅎ 감독까지는 기억 못 했슴다.
주말에 찬찬히 다시 볼까 해요.
18 슈샤드  
시드니 폴락의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뭔가 봐야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어서 거의 다 본 것 같은데 제레미아 존슨은 아직이네요. 하스미시계있고님의 깊이 있는 글에 안 볼 수가 없겠네요.
여건상 스크린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큰 화면으로 감상해 보겠습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17 바앙패  
모가디슈는 영화관에서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