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미 올 해 최고 작품을 뽑았습니다.

영화이야기

저는 이미 올 해 최고 작품을 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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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이 아직 많이 남았지만, 앞으로 볼 영화가 이 영화들 보다 좋은 영화가 없을 거라는 건 확실하기에 글을 써봅니다.

2019년은 제게 불행한 해였습니다. 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의 기획한 <여성 영화의 선구자들: 도로시 아즈너 & 아이다 루피노 특별전>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021년은 그런 면에서 제게 최고의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도로시 아즈너 특별전>을 개최하기 때문입니다.

도로시 아즈너의 영화를 띄엄띄엄 봤습니다만, 한꺼번에 아홉 편을 갖추어 놓고 본다는 것은 정말 황홀한 경험입니다.

이 위대한 여성 감독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1897년, 1898년, 1900년으로 번갈아가며 기재되어 있는데, 샌프란시스코 화재 때 기록이 소실되어서 그녀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신빙성이 높은 것은 1897년설인데 그렇다면 할리우드의 위대한 감독 프랭크 카프라, 하워드 혹스, 작가 윌리엄 포크너와 같은 나이입니다.

게다가 존 포드, 장 르누아르, 킹 비더, 조셉 폰 스턴버그 같은 만신전에 있는 감독과 비교해 보더라도 불과 세 살 아래인 나이입니다.  

이 말은 도로시 아즈너가 감독 데뷔할 때 무성 영화로 시작했고 얼마 뒤 토키 영화 시대로 진입했음을 의미합니다(아쉽게도 그녀는 컬러 영화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무성 영화로 시작했던 감독이란 말은 울림이 큽니다. 영화가 지금처럼 3D다, 아이맥스다, THX 시스템이다, 8K다 이런 것을 결정하는 것은 감독의 힘을 넘어서는 기술적이고 자본적인 문제입니다.

하지만 무성 영화에서 출발한 감독들은 영화라는 미지의 숲에 최초의 길을 내었습니다. 말그대로 영화의 문법을 발명한 것이지요. 도로시 아즈너는 토키 영화 초기에 배우들의 연기에 자유를 주기 위해 고민을 한 사람입니다. 영화가 무성에서 유성으로 바뀌자 배우들이 마이크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연기를 해야 했으니까요. 그녀는 붐마이크를 발명해서 배우들의 족쇄를 풀어줬습니다.

영화가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훨씬 다양한 길이 열려 있었던 시기의 영화, 그래서 오늘 날 어떤 테크닉을 부리는 영화와 비교해봐도 이 시기의 영화가 훨씬 세련되었습니다.

게다가 도로시 아즈너는 시나리오 작가, 편집 기사를 거쳐 감독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말은 영화의 3단계, 즉 프리 프로덕션(각본), 프로덕션(연출), 포스트 프로덕션(편집)의 과정을 다 장악할 능력을 갖추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도로시 아즈너의 눈부신 연출력은 보는 이의 넋을 잃게 만들지요. 예컨대 <댄스, 걸, 댄스>은 여자 무용수들이 춤을 추고 있는 도박장에 경찰들이 검문을 하러 들이닥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춤과 음악이 멈추었는데 그 곳에 있던 고주망태 남자가 여자 무용수를 꼬셔서 춤을 추자고 합니다. 무용수가 음악이 없는데 어떻게 춤을 추냐고 말하자, 남자는 문제가 없다는 듯 휘파람을 불며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풍부한 사운드로 춤을 추다가 갑자기 음악이 끊기고 휘파람 춤으로 바뀌는 무드의 전환은 마법과 같습니다. 마치 고음에서 저음까지를 자유자재로 부르는 실력 있는 가수의 노래와 같다고 할까요.

동시에 그것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소리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도로시 아즈너의 영화는 영화를 보는 중에 자리에서 튕겨나올 것만 같은 멋진 장면들이 있습니다.

영화의 운을 믿는 씨네필이라면 8월 1일까지 진행되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여름 바캉스를 영화관에서 보내는 것이 결코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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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Comments
14 Harrum  
큰 화면으로 볼 수 있다니 부러워요.
전 이 감독님 영화는 달랑 두 편만 봤지만 내공이 느껴졌어요.
어떤 처지에서 제작됐는지가 언뜻언뜻 보여 안타깝기도 했어요.
(암튼 부럽습니다~)
21 에릭카트먼  
서아시도 망했고(?) 영전이 있는 부산으로 이사가고 싶네요 정말 ㅠㅠㅠㅠ
20 암수  
씨네스트에 소개된 <댄스걸댄스><우리는 즐겁게 지옥에 간다> 이외에 하스미님의 추천 베스트 3는?
일부러 안 봤을 듯한 영화를 뽑았습니다^^. <워킹 걸즈>, <나나>, <붉은 옷의 신부>
20 암수  
참고하겠습니다...이런 영화는 기획전 아니면 절대 볼 수 없는 영화들...
개인적으로 예를 들어 <걸작전> 이런 것보단 <oo감독 기획전> 이런 형태를 더 좋아라 합니다...
한 감독에 대해 심층적으로 파고 들수 있을 뿐더러...
여러 명작들을 한데 모은<걸작전> 요런건 솔직히 80~90%는 다 본 영화들이라..
한 감독을 집중 파고 드는 <감독 기획전> 이 진짜 시중에선 절대 볼 수 없는 희귀보물들이 가득해서 더 좋더군요...
<워킹 걸즈>는 <댄스, 걸, 댄스>의 원형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특히 카메라의 움직임과 심도를 눈여겨 보십시오. 이런 감독 특별전에서 모아놓고 보면 한 감독의 영화 세계가 어떻게 연관, 확대, 변화 되는 것을 파악할 수 있어 좋은 것 같습니다.
26 장곡  
기회가 되면 감상을 해야겠네요.
13 소서러  
올라운드 플레이어급 수재에다가 획기적인 발명가였군요.
그것도 업계에서 부딫히면서 확성기를 어찌나 놀라지 않을 수가 없던지..
연출을 일찍 그만둔 게 진짜 안타까운 분이시죠.
서울에서 나중에 새로 기획전 열리면 꼭 가보고 싶네요.
테크닉에 대한 신통력 이야기 고맙습니다.^^
10 에버렛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부산 내려가서 봤을텐데 아쉽습니다
10 dooyacom  
http://www.dureraum.org/bcc/mcontents/progView.do?rbsIdx=60&progCode=20210713001
소개해주신 덕분에 마음껏 호사를 누렸습니다. 부산에 사는 게 흐뭇한, 여유로움을 가끔 느낍니다
6 슬픈신노스케  
부산에 갔을 때 시간을 내서 갔어야 했는데 아쉽습니다.
저는 이번에 상영작 모두 올킬했습니다. 황홀한 시간이었네요. 서울 아트 시네마에서 씨네 바캉스 프로그램에 아즈너 영화 두 편 소개되네요. 챙겨 보세요.
20 암수  
기존에 4편은 봤었고 이번에 추가 4편 보고...<나나> 빼곤 다 보았습니다...
지난 번과 이 번에 영화를 겹치는 것 빼면 총 10편이 상영되었습니다. <나나> 외에 한 편 더 놓치신 듯.
12 쪼으니까  
설명이 아주 대단하시네요
짝! 짝! 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