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들(1)

영화이야기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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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 큰 수술을 했습니다. 배를 가르고 15센티 종양을 빼내고 대장, 소장 합쳐서 80센티를 잘랐습니다.

후복막 육종암이라는 희귀함이라 하더군요. 종양만 제거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재발 가능성이 높은 병이랍니다. 암이라는게 참 무섭더군요.

의사의 말은 냉정했습니다. 이 병은 따로 항암치료가 필요없고 재발하면 무조건 장기를 광범위하게 자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더 이상 자를 수 없게 되면 죽는 것이다.

짜증보다는 허탈함이 더 컸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죽음이 너무 가까이 다가 온 느낌입니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에...


병원에서 퇴원을 하면 무조건 열심히 독서와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 밖에 안했습니다. 지금은 수술 후 있을지 모를 장유착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대장이나 소장을 자르고 나면 발생하는 진물에 의해 장이 붙어버리는 현상을 말하더군요. 심한 경우 재수술을 하거나 장폐색으로 이어지면 사망으로 연결된다고 하네요.

평생 듣도보도 못한 병에 걸리고 재발과 다른 후유증으로 잔뜩 긴장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어쨌든 세상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고 내가 집중해서 할 수 있는 일은 현상황에서는 영화를 보는 것 밖애 없습니다.

퇴원 후 마침 전주 국제영화제가 진행 중이라 아픈 수술 부위를 쓰다듬으며 영화를 봤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는 다행히 온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더군요.

몸이 완전히 회복이 안된 상태라서 단편 영화들을 많이 봤네요.


제일 먼저 보고 싶었던게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였습니다. <10월의 울림>이었습니다. 5분짜리인 이 영화와 18분짜리 자파르 파나히의 <숨겨진>은 영화제 어떤 영화보다 긴 울림을 남겼습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현재 콜롬비아에서 영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태국 출신의 이 총명한 감독도 자국의 검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는 거의 예술적 망명을 하다시피 콜롬비아 정글로 찾아갔습니다. 문제는 역시 코로나 팬더믹이었습니다. 영화 촬영 중 코로나 확산을 우려해서 다시 태국으로 돌아온 것이지요.

아피찻퐁이 다시 찾아온 고국에서 두 가지 경험을 합니다. 자기가 살고 있던 곳 주변 숲에 산불이 난 것과 게속 악화되는 태국의 정치적 상황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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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피찻퐁은 불탄 숲을 거닐다 다시 숲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10월의 울림>은 거기서 출발합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어딘지 모를 장소에 이불 같은 천막 하나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비소리 바람 소리가 들리고 들리고 천막 너머로 푸른 숲이 보입니다.

잠시 후 천막에 다른 화면이 비춰집니다. 천막에 동굴의 모습이 디졸브됩니다. 인류의 예술이 처음 시작된 알타미라의 동굴인지, 아니면 우리가 <엉클 분미>에서 본 동굴인지 모르겠습니다.

한참 동안 카메라는 천막을 보여주다 화면은 천막 너머의 숲을 응시하면서 끝납니다. 숲에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이란의 자파르 파나히는 팬더믹 이전에도 이란 정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그의 영화가 점점 단순해지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이러한 표현의 제약 속에서도 영화 제작이 가능하다는 형식적 실험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작인 <택시>나 <3개의 얼굴들>처럼 역시 자동차 안에서 영화를 찍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딸인 솔마즈 파나히가 뒷 좌석에 합류합니다.

이 영화는 이 두 사람이 들고 있는 휴대폰으로 촬영된 다큐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부녀는 한 여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극 기획자인 여인이 등장하고 차에 오르면 그녀가 안내를 합니다. 그들이 찾아가는 곳은 연극 기획자가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여인이 사는 곳입니다.

그들이 찾는 신비의 여인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목소릴 가진 여자입니다. 연극 기획자는 그녀를 무대에 오르게 하고 싶은데 집안의 반대로 일을 성사시킬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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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여인이 사는 곳에 차가 도착하고 그녀의 어머니를 설득하지만 어머니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방문객에게 허용되는 것은 그녀의 모습을 찍을 수 없고 목소리만 들을 수 있는 것 뿐입니다. 

자파르 파나히 일행은 집 안에 들어가  커튼 뒤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휴대폰에 담습니다. 보이지 않는 여인, 커튼 뒤에 들리는 그녀의 모습. 카메라는 그것을 응시하다 끝을 맺습니다.


두 영화 모두 커튼(/장막)이 나옵니다. 장막은 가리는 것이고 숨기는 것입니다. 두 감독에게 그것은 검열과도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이 예술가들에게 장막은 스크린이라는 은막으로 변합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장막에 동굴 이미지를 디졸브 시킴으로서 현재의 시공간을 점프합니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와 장막 너머의 숲이 소생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불탄 숲이 다시 살아나듯 태국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자파르 파나히는 커튼 뒤에서 울려오는 여인의 노래 소리를 담으면서 커튼 너머를 상상하게 합니다. 눈 앞에 볼 수는 없지만 상상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예술이고 자유일 것입니다.


두 영화 다 합쳐서 고작 23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올해 본 영화들 중에 가장 긴 여운을 주었던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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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Comments
3 장산해운대  
태국과 이란.
정치적 검열이 여전한 국가들
S 컷과송  
건강하셔야 합니다. 재발은 없을 겁니다.
5년간 생존률이 40%네요. 마음을 가다듬으려해도 착잡한 건 어쩔 수 없네요.
S 컷과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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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Har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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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줄리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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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drihavefun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내용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