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달라졌을까요? - 에릭 로메르의

영화이야기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 에릭 로메르의 <보름달이 뜨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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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에릭 로메르는 장 뤽 고다르처럼 안하무인의 태도를 지닌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영화처럼 단순하지만 우아하고, 과묵하지만 웅변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의 '희극과 격언' 연작 중 네 번째 작품 <보름달이 뜨는 밤>(1984)을 보면서 다시 한번 이런 인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물 네살의 루이즈(파스칼 오지에)는 파리에 있는 디자인 회사의 인턴으로 연인인 건축가 레미(체키 카료)와 파리 외곽의 마른 라 발레 지역에 삽니다.

레미의 사무실이 그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루이즈는 전형적인 80년대 파리잔느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열정을 이제 막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마른 라 발레 지역에서는 채울 수가 없습니다.

무료함을 달래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유부남 친구 옥토버(파브리스 루치니)입니다.

금요일이 되면 그와 함께 클럽에서 춤을 추는 것이 그녀의 즐거움이지요.

 

 

세를 주고 있던 파리의 집에 사람이 나가자 루이즈는 그 집을 자기만의 방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금요일 밤을 파리에서 진탕 보내고 토요일 늦게 레미의 집으로 돌아오려는 것이지요.

레미는 당연히 반대하고 이때부터 두 사람의 옥신각신이 심해집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황량한 마른 라 발레 지역의 풍경으로부터 시작합니다(위에 올려 놓은 첫 번째 동영상 참조).

나무와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보아 계절상으로는 겨울입니다.

카메라는 그 곳을 143초 동안 좌에서 우로 둥그렇게 패닝합니다.

파리 동부에 위치한 이 도시는 우리로 치면 성남 분당 정도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1969년부터 개발이 시작되었으나 영화가 만들어진 1980년 초반까지만 해도 아파트 외에는 눈에 띄는 것이 없는 사막과 같은 곳이지요.

 

 

카메라가 움직이면 길 건너 편에 남자 세 명이 화면에 들어오는데 그들이 들고 있는 트라이포드로 보아 이 사람들은 측량기사들로 여겨집니다.

로메르는 이 지역이 개발지라는 것을 아무 설명 없이 이렇게 쓰윽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카메라가 180도로 움직이면 아파트 정문을 잠시 비춥니다.

그리고 이제 천천히 크래인 업하면서 자막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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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과 격언' 시리즈의 네 번째 격언인 '두 여자를 가진 자는 영혼을 잃고, 두 집을 가진 자는 이성을 잃는다'라는 글 귀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해서 등장하는 것이지요.

사실 '희극과 격언' 시리즈의 격언들은 프랑스 특정 지역에 전해내려 오는 것이 아니라 로메르가 영화에 맞게 만든 문구입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격언들이 영화의 내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따져보는 것도 이 연작을 보는 재미가 됩니다.

 

 

두 번째 씬은 실내에서 시작됩니다. 레미가 베란다에서 운동을 하는 모습이 나오고 11월이라는 자막이 나옵니다

(이 영화는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4개월에 걸친 이야기입니다. 봄을 넘기지 못하고 겨울에서 끝나지요).

방 안에는 루이즈가 유부남 친구 옥타브와 저녁 약속을 잡는 장면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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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해서 볼 점은 루이즈-레미 두 사람을 하나의 공간에서 잡지 않고 분리해서 시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루이즈는 레미 몰래 옥타브와 저녁 약속을 하고 있고요.

루이즈가 이층 침실에서 내려오기 전에 창 밖을 한번 내려다 봅니다.

아래층 베란다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레미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루이즈와 레미가 살고 있는 마른 라 발레 지역의 이 아파트는 바깥의 풍경은 황량한데 안은 직선적인 구도가 잘게 잘게 쪼개져 차갑게 딱딱하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벽에 걸려있는 몬드리안의 그림마저 사각형이니 이 연인들의 심리상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밤 댄스 파티에 가지 말라는 레미의 말을 무시하고 걸어가는 루이즈의 뒷모습에서 한 겨울의 직선같은 찬바람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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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공간을 보여줄 때 특이한 면이 있습니다. 루이즈와 레미의 집, 루이즈가 혼자 기거하는 파리의 집, 옥타브의 집.

이 세 공간에 등장인물을 보여주는 방식이 조금씩 다릅니다.

먼저 루이즈와 레미가 같이 사는 교외의 집에서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침실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 커플의 성생활이 원만하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이즈가 혼자 살고 있는 파리의 집에서 옥타브는 안쪽 공간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옥타브와 그의 아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도 안쪽 침실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영화 내내 이 룰은 철저하게 지켜집니다.


이것은 (옥타브가 육체적 관계를 요구함에도) 두 사람 사이가 선을 넘지 않는 관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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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있는 루이즈 집을 보면, 고풍스런 장식 기둥이 눈에 들어 옵니다. 전체적인 톤도 무채색인 이 공간에서 루이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루이즈는 레미나 옥타브가 아니라 댄스 파티에 만난 이름 모를 뮤지션과 잠자리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남녀가 침실에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되지요.

그 날은 파리에 보름달이 뜨는 날입니다.

서양에는 달의 차고 기우는 것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관념이 있습니다.

달을 뜻하는 luna, moon에는 lunatic, moonstruck이라는 단어가 있지요. 여기에는 감상적인, 미친, 변덕스러운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게다가 full moon은 섹스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감상적이고 변덕스러운 루이즈는 몇 번 보지도 않은 남자를 침실로 끌어들여 달빛 아래서 섹스를 합니다.

정신이 나갔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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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가 끝나고 루이즈는 달빛 아래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마른 라 발레에 있는 레미가 생각납니다.

카페에서 첫 기차를 기다리다가 그녀는 레미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집에 문을 열고 들어선 루이즈.

이층에 있는 두 사람의 침실에 올라갔을 때 우리는 지나치게 잘 정돈된 침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침대를 온전하게 나온 것은 이 장면이 처음이지만 거기에는 레미가 없고 겨울의 한기만 남아 있습니다.

레미의 부재를 증명하는 반듯한 침대, 그것은 사랑의 상실을 시각화 합니다.

파리의 루이즈 집과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일층으로 내려 온 그녀는 차가운 겨울 바람에 얼어붙은 듯 문 안에 서 있습니다.

사각의 문이 그녀를 가두고 영화는 갑자기 암전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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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씬은 차에서 내리는 레미의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레미는 소파에 잠든 루이즈를 발견합니다.

이때부터가 중요합니다(링크된 동영상 참조).

 

 

로메르는 여기서부터 아주 긴 시간을 쇼트를 나누지 않습니다.

루이즈가 일어나고 레미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두 사람은 마주보지 않습니다.


레미는 루이즈 뒤쪽에 서 있고 자신에게 여자가 생겼음을 이야기합니다.

이 장면에서 쇼트를 나누어 두 사람을 쇼트-역쇼트로 보여줬다면 영화는 아마 평범해졌을 것입니다.

로메르는 여기에서 배우를 믿습니다.

루이즈 역을 맡은 파스칼 오지에는 자신의 짧은 영화 인생에서 가장 멋진 연기를 불태웁니다.

이 영화가 그녀의 마지막 영화였으니까요(영화가 만들어지고 얼마 후 약물 중독으로 사망).

우리는 레미의 고백(후경)과 루이즈의 울먹이는 반응(전경)을 하나의 쇼트로 다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 중에 가장 리허설이 길었던 영화입니다.

촬영 감독 레나토 베르토는 자신이 그 때까지 만든 영화 중에 <보름달이 뜨는 밤>이 가장 럭셔리한 영화였다고 훗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제작비가 많이 들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배우와 기술진이 영화를 위해 준비한 시간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에릭 로메르의 작업 방식은 영화를 둘러싼 전반적인 토론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나리오에 대한 리딩과 만들어진 사운드 레코딩에 대한 지휘를 하기 시작하지요.

그 다음에 대규모 리허설을 진행합니다. 이때 수퍼-8 카메라로 예비 촬영을 한다고 합니다.

 

 

그 결과 실제 촬영 때는 매우 적은 테이크, 대략 평균 두개 내지 세개의 테이크로 찍고 어떤 경우에 원 씬 원 테이크로 촬영을 마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저명한 평론가인 알랑 베르갈라와 알랑 필립퐁은 이같은 세심한 준비를 '에릭 로메르 예술의 전부'라고 하면서 '감독, 배우, 스탭 사이의 진정한 삼투압(osmos)가 발생할 때 로메르의 작품이 만들어진다'

고 했습니다. 리허설은 이 삼투압이 이루어지는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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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워하는 루이즈를 달래주는 레미. 루이즈는 두 사람의 사랑이 이제 끝났음을 알고 그에게서 떨어집니다.

루이즈가 레미에게서 떨어지자 드디어 쇼트가 나누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앞의 쇼트를 길게 하나로 이어간 것은 두 사람의 이별을 카메라가 기다려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층의 방으로 올라가 자신의 물건을 챙기는 루이즈.

그녀는 갑자리 옥타브에게 전화를 해서 저녁 약속을 잡습니다.

그리고 집을 나와 기차역을 향해 걸어가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지금 설명한 이 장면은 영화의 첫 장면을 거꾸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영화 첫 장면에서 카메라가 두 사람을 공간적으로 나누었다면 마지막 장면도 그런 방식으로 하고 있지요.

하지만 달라진게 분명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루이즈가 옥타브에게 전화 약속을 하고 집을 나올 때, 레미의 쇼트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루이즈에게서 레미는 이제 떠나간 연인이 된 것이니까요.

 

 

이 영화는 파리와 교외 지역이라는 두 공간을 통해 이동과 정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루이즈는 두 공간 사이를 오가며 유목적인 사랑(nomad love)를 꿈꾸는 인물입니다.

그녀의 사랑은 실패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루이즈의 사랑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랑을 찾는 과정을 다시 시작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영화는 어찌보면 온전히 에릭 로메르의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루이즈 역을 맡은 파스칼 오지에는 스크린 안과 밖에서 맹활약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배우의 역할 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세트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그녀의 노력 때문에 1980년대의 룩(Look)이 이 영화에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이죠.

<보름달이 뜨는 밤>이 에릭 로메르의 초기 '희극과 격언' 시리즈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파스칼 오지에라는 천재적인 배우이자 디자이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독과 배우, 스탭이 서서히 삼투작용을 일으키며 만들어진 영화, 그것은 초생달이 점점 보름달로 차오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깊은 밤 잠이 쉽게 들지 않을 때, 아름다운 이 영화를 감상해보시길 바랍니다.

두서없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보름달이 뜨는 밤>은 오철용님의 번역으로 씨네스트에 있습니다.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806398&sfl=wr_subject&stx=%EB%B3%B4%EB%A6%84%EB%8B%AC%EC%9D%B4+%EB%9C%A8%EB%8A%94+%EB%B0%A4&sop=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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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Comments
20 암수  
잘 읽었습니다...집 수납장에 켜켜이 먼지가 쌓여있는 본 작품을 다시 꺼내어 봐야것네요...
"파스칼 오지에" 이 천재적인 예술가가 20대 중반의 나이에 너무 빨리 가버렸네요...
자크 리베트의 히로인 "뷜 오지에"가 그녀의 엄마로
<북쪽에 있는 다리>에서 모녀가 함께 출연하여 자유분방한 돈키호테적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는데...
더 많은 것을 보여줄수있는 그녀였기에 안타깝네요...
써놓고 보니 너무 길고 설명을 위해 올려놓은 동영상 파일도 유튜브 저작권 위반으로 삭제 되었네요.
제 의도가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4 Harrum  
오 쉬뜨! 오 쉬뜨! 오 쉬뜨! 오 쉬뜨! 오 쉬뜨! 오 쉬뜨! 오 쉬뜨!
영상이 그새 신고먹었나 보네요.
진짜 영상이 없으니 제 이해력으로는...
일단 영화부터 볼게요 ^^
이 영화 정말 좋습니다. 꼭 보세요.^^
13 소서러  
저도 먼저 영화부터 봐야 글을 정독할 수 있겠네요^^
체키 카료라는 배우는 과거 90~2000년대 헐리웃 상업영화들에서
보던 배우인데 아트하우스작에서 보게 되는 건 처음이겠네요..
17 달새울음  
전 영화를 문학적으로 읽는 버릇이 있어서 숏바이숏으로 감상이 안되더라고요.
영화의 진정한 의미는 숏바이숏일텐데말입니다.
언제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10 dooyacom  
정갈하고 완벽한 해설이 놀랍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3 골로짱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영화 꼭 보고싶네요
40 백마  
보려하는데 안뜨네요.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