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멸의 천사 (the Exterminating Angel, 1962) Luis Bunuel

자막자료실

절멸의 천사 (the Exterminating Angel, 1962) Luis Bunuel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995804

* 제가 2년전 작업한 자막을 찾으시는 분이 있으셔서

블루레이 새릴에 맞추어 다시 올립니다.^^ 

 

 

여러분들은

루이스 부뉴엘을 좋아하세요? 

 

스페인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멕시코를 사랑하고 멕시코에서 죽었던,

초 현실주의 감독이었던 그의 작품 중 가장 난해한 영화라고 하는

 

절멸의 천사 (학살의 천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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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부뉴엘 영화가 다 어렵지만

(앙딸루시아의 개, 비리디아나, 트리스타나, 벨드주르, 나자린, 올비다도스, 자유환상, 욕망모호...)

알로 먹을 만한 게 하나도 없는건 알지만, 따로 누구한테 물어봐도 아무도 모르네요.

 

그래서, 말많은 저도 딱히 할말 이 없습니다. 

(진짜, 제목처럼 영화도 잘 모르면서 저같이 떠드는 사람들을 모조리 싹 죽여 버리겠다는 뜻 같습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참 이해가 어렵습니다. (고수님들, 이해 하신 분께서 설명을 좀...) 

'이해는 없고 느낌만 있다' -그래, 그 느낌이 중요한 거야, 말하겠죠?

길진 않지만, 워낙 악명 높은 영화라 4번 정도 보았는데 뭔가 느낌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 영화 리틀 애쉬스에서 부뉴엘과 살바도르 달리, 시인 페데리코 로르카

우정이 나오죠, 이 영화에선 첼로를 부수어 불을 때는 장면이 있는데, 그건 실제

스페인 첼리스트 카잘스 와의 불화 때문이었다네요.  

 

PS: 영자막 전면 재해석으로 애써 만들었지만,

완전 오역 자막이라도 이해(?)에는 무리가 없을 듯...

(농담입니다, 만만찮은 이 영화, 함 도전해 보세요^^)

 

PS: 오래 기다렸던 블루레이 릴이 나타나

새로 씽크 작업을 하여 다시 올립니다.

찾으셨던 분들께 더이상 고생이 없으시길...^^

 

 

 

 

 

Comments

GIVE 5 MP 20 빠깡
보고싶었는데 좋은 화질로 감상할 기회가 생겼네요
감사합니다
39 범부
감사합니다
37 Rookie
수고하셨습니다
47 CaMillo
강사합니다.^^*
32 블랙이글
수고하셨습니다.^*^
16 TylerDurden
고맙습니다.

S MacCyber
수고하셨습니다.
23 까마귀
수고 많으셨습니다~
3 kaycorea
잘볼께요 감사합니다^^
8 Ashel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8 이야호
고맙습니다
GIVE 3 MP S 푸른강산하
감사합니다.^^*
37 보라™
수고하셨습니다^^
GIVE 100 MP 14 스눞
억!!! 정말 오랫동안 찾던 한글 자막입니다.
감사합니다. 만세!!!
GIVE 10 MP 11 DeadShot
좋은 자막 감사드립니다
GIVE 3 MP 32 까치와엄지
고맙습니다.
28 ll레온
감사합니다
48 RainBow
수고하셨습니다! ^^
34 HAL12
귀한 자막 감사합니다~
M pluto
고맙습니다!!! ^^
GIVE 3 MP 42 신동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추카추카 37 Lucky Point!

S rayphie
고맙습니다.
26 얼기설기
감사합니다~~
31 Cinephile
수고하셨습니다
11 방콕맨
감사합니다~.
34 진트
수고하셨습니다
11 아자니
감사합니다.
S 컷과송
2020. 6. 4. 재감상

단평 : 어디에나 극장이 있다.


 '꿈. 꿈이 되는 꿈'이라는 노랫말에서 시작해야한다. 본편이 요청하는 것은 꿈의 해석이며,
비로소 꿈에 대한 개입으로서의 꿈이기 때문이다. 감독의 세계 내 계보상 <비리디아나>가
<나자린>을 승계했듯이 본편이 윗길 <비리디아나>의 또다른 지류임은 외형상 선명하다.
비리디아나를 연기한 실비아 피날이 본편에서도 순결한 처녀로서 '안밖'을 오가는 성찰을
 선도하는 캐릭터의 맥락과 <비리디아나>의 장소로서의 저택괴 존재론적 갇힘이 반복된다.

​이에 반해 전작들의 카톨릭의 한계는 결말부에서 불쑥 강조되는 것 외에는 비교적 수축되고
 부르조아의 나신이 전작의 자연주의적 인간론을 고립의 문채로 덧칠한다. 이같은 맥락에서
 계급, 종교를 성/죽음의 부뉴엘적 기표와 같이 배제시킨 이후 잔여물은 SF적 장소성이다.
이는 오프닝의 '신의 섭리 街'라는 표지판과 연결되는데, 여기서 섭리는 다름 아닌 꿈이다.
저택의 응접실은 부르조아를 집단 무의식으로 초대하는 꿈이 되는 꿈의 장소로 기능한다.

​결계는 내부의 무의식에서 생산되며, 이는 재차 욕구적 동물로서의 '인간'으로 추락한다.
흥미롭게도 이 의식의 시작을 창문깨기로 순결한 처녀가 행한 이후에 내부를 휘감는 촬영은
 피아노의 음률을 전체화한다. 즉, 예술이 벽을 구축하고 꿈으로의 긴 여로로 인도함이다.
잔혹함으로서 그 공간이 극장이라면 흥미로운 지점은 본편 안에 밖이 대기중이라는 점이다.
단순한 이분법을 구사하기를 거부한다면 밖의 갇힘이 불가한 것 외에도 영화관 입장권을
 구입 지불할 자격 혹은 체질이 외부인들에게 내재되지 않았음이 중요하다. 이것은 극장의
 권능이며, 조금이라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소년의 손에 쥔 풍선의 유무는 직설적이다.

​본편의 해제인 위치의 동력은 어디에서 오는지는 흥미롭다. 피아노 연주 예술과 순수 처녀의
 진단과는 별개로 본편은 이미 과거화된 죽음들과 변형된 물체들에 대해 슬쩍 무시해버린다.
마치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삭제하고픈 무의식을 반영하려는 듯 초현실의 과오를 망각한다.
당연하게도 그같은 과정의 끝에는 이미 아버지의 법을 거세하려는 환상으로서 호명된 바
 카톨릭이 귀환한다. 해당 의식이 장례식이라는 어떤 징조도 없을 때 이 극장은 폐관된다.
4 Cinephile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