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한 사람이 들어오고, 밤에 두 사람이 나간다는 측면에서 본편은 가족 시네마의 외형을 선명히 드러낸다. 당연하게도
감독의 세계에서 이 구성원에 남성이 포함될 여지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들고 나가는 장소성으로서의 내부는
오프닝에서 남성을 내침으로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단락에서 게이샤 인물이 남성에게 취하는 태도는 기실 영화라는
매체적 속성을 희롱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이 맥락에서 게이샤라는 직위는 본편 내내 영화의 운명론과도 다르지 않다.
게이샤가 남성들의 결탁 그리고 자기 희생의 지향 아래 버섯을 벗을 때 시선이 누구의 것일 수 있는지 음미해야만 한다.
그 단락을 비롯 인물이 프레임 내 또다른 배치물로서의 사각 프레임으로 인해 가려지거나 초점의 심도를 점유할 때
게이샤는 좁은 골목길에의 정서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에서 온전히 보존되어도 좋을 유일한 실체로서 자리잡는다.
거기에 굳이 화분에 심어진 꽃이 동행하지 않는다해도 달라질 진실 따위는 없다. 팔려야한다는 것과 팔고싶지 않은 것,
모순된 정체성 안에서 인물이 경계를 지키려할 때 그들은 혀를 깨물거나 슬쩍 건너를 보면서 어렵사리 발을 들어낸다.
전술한 희생이 30, 40년대 전작들에서 갑자기 복구했을 때 그 자리에는 더 이상 아들-남성이 아닌 딸-여성이 배정된다.
그러므로, 본편을 가볍게 <기온의 자매>의 모녀편으로 상정하는 것은 어색하다. 자매-모녀의 위치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경로의 끝과 다짐이 카메라와 가지는 거리만큼이나 완연히 차별화된다. 무엇보다 본편은 둘의 얼굴이 모두 드러난다.
다른 맥락에서 본편은 <유키 부인의 초상>의 반대편으로서 자리매김한다. 코구에 미치요-나루세의 배열에서 1952년작
<오쿠니와 코헤이>를 여기에 추가한다면, 본편의 정점으로서 풀어야했던 옷자락이 욕망과 포기의 전선으로부터 이탈,
동일한 결과의 색다른 굴종으로 교차 대체됨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편은 성장보다는 출산의 수난에 가깝다.
추카추카 22 Lucky Point!
단 평 : 출산의 고통
낮에 한 사람이 들어오고, 밤에 두 사람이 나간다는 측면에서 본편은 가족 시네마의 외형을 선명히 드러낸다. 당연하게도
감독의 세계에서 이 구성원에 남성이 포함될 여지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들고 나가는 장소성으로서의 내부는
오프닝에서 남성을 내침으로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단락에서 게이샤 인물이 남성에게 취하는 태도는 기실 영화라는
매체적 속성을 희롱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이 맥락에서 게이샤라는 직위는 본편 내내 영화의 운명론과도 다르지 않다.
게이샤가 남성들의 결탁 그리고 자기 희생의 지향 아래 버섯을 벗을 때 시선이 누구의 것일 수 있는지 음미해야만 한다.
그 단락을 비롯 인물이 프레임 내 또다른 배치물로서의 사각 프레임으로 인해 가려지거나 초점의 심도를 점유할 때
게이샤는 좁은 골목길에의 정서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에서 온전히 보존되어도 좋을 유일한 실체로서 자리잡는다.
거기에 굳이 화분에 심어진 꽃이 동행하지 않는다해도 달라질 진실 따위는 없다. 팔려야한다는 것과 팔고싶지 않은 것,
모순된 정체성 안에서 인물이 경계를 지키려할 때 그들은 혀를 깨물거나 슬쩍 건너를 보면서 어렵사리 발을 들어낸다.
전술한 희생이 30, 40년대 전작들에서 갑자기 복구했을 때 그 자리에는 더 이상 아들-남성이 아닌 딸-여성이 배정된다.
그러므로, 본편을 가볍게 <기온의 자매>의 모녀편으로 상정하는 것은 어색하다. 자매-모녀의 위치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경로의 끝과 다짐이 카메라와 가지는 거리만큼이나 완연히 차별화된다. 무엇보다 본편은 둘의 얼굴이 모두 드러난다.
다른 맥락에서 본편은 <유키 부인의 초상>의 반대편으로서 자리매김한다. 코구에 미치요-나루세의 배열에서 1952년작
<오쿠니와 코헤이>를 여기에 추가한다면, 본편의 정점으로서 풀어야했던 옷자락이 욕망과 포기의 전선으로부터 이탈,
동일한 결과의 색다른 굴종으로 교차 대체됨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편은 성장보다는 출산의 수난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