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춘 (Banshun, 1949) - Late.Spring.1949.1080p.BluRay.x264-SSF (재수정)

자막자료실

만춘 (Banshun, 1949) - Late.Spring.1949.1080p.BluRay.x264-SSF (재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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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 노리코는 아내를 잃고 혼자된 아버지 소미야 교수를 돌보며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소미야 교수와 고모 마사는 노리코의 장래를 염려한다. 아버지를 홀로 두고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시집가기를 꺼려 하는 딸을 위해 아버지와 고모는 마치 아버지가 재혼하려는 것처럼 노리코를 속인다. 재혼을 결심한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낀 노리꼬는 사다께와 선보기로 결심한다. 사다께를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과 그를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그러나 마침내는 결혼을 하게 되고 소미야와 노리코는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그들의 갈등은 해소되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해 하는 노리코에게 결혼에서의 행복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인내로서 가꾸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처음으로 죽은 자신의 아내를 언급하며 아내가 혼자 참고 견뎌내야 했던 수많은 시간들에 대해 회상하는 소미야는 이 순간 아버지가 아닌 오랜 시간을 먼저 살아본 인생 선배로서 스스로의 삶을 통해 터득한 인생의 진리를 딸에게 고백한다. 비록 딸 앞에서는 담담하고 씩씩한 모습을 보였던 소미야지만, 막상 딸을 시집보내고 텅 빈 집으로 돌아와 쓸쓸함과 외로움에 고개를 떨어뜨리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레논님이 올리신 자막을 Late.Spring.1949.1080p.BluRay.x264-SSF 릴에 맞춰 재수정했습니다.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935667 

 

 

저번에 올린 글보다 좀더 싱크를 맞춰서 보기 편하실겁니다.

싱크 일일이 수작업은 처음해보는데 힘드네요 ㅠ

 

즐감하시기 바랍니다 ㅎㅎ

 

Comments

S 컷과송
2022. 11. 26. 3번째 감상


단 평 : 거짓말의 잔존


하라 세츠코가 도착했다. 늙어야할 류 치슈도 곁에 있다. 여기부터 오즈의 후기라고 진술된다.

30, 40년대의 배우들의 빈자리, 2층은 더 이상 내려다보는 위치가 아니며, 영화 포스터는 사라졌다.

실내는 어지럽혀지지 않고, 누구도 상대의 뺨을 때리지 않는다. 계단은 보여져서는 안되는 금기다.

이후의 12편에 위의 부재는 위반되거나 귀환하여 필로우 숏처럼 무심하게 배치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본편에 난무를 넘어 산적한다고 해야할 잉여들의 향연은 그들의 몫 이상으로 뒤흔든다.


리듬감의 기초가 반복에서 온다면, 아버지의 대답과 딸의 대답 형식이 말을 삭제시킨 채 그저

단발마의 비명처럼 '응'으로 처리되어야한다는 고집조차도 공포가 된다. 부정하고자 할 때 차마

그 진심을 드러낼 수 없음이라는 삶에 대한 관조는 언어의 부차적인 면모에 대해 응징을 가한다.

가령, 장례식은 보여질 수 있어도 결혼식의 전시는 결코 허락될 수 없음에서 이같은 두터운

배제는 결혼식 차량 위에 들러붙어 마구 흔들어보이는 소년의 운동에 대해 애착을 보낸다.


열린 실내는 거리감을 위해 조성된다. '앉으라'라고 누군가 말할 때마다 심도와 상관없이

심리적 간극이 좁혀질 리 없음을 묵언한다. 오프닝의 다도 모임을 포착한 카메라는 깊이를

불가역성으로 등식화했다. 여기에 인물이 수미상관의 전통 의상 외에 나머지 장면에서는

항상 서양식 복색을 착용했음을 상기하자면 이 간극 역시 되새길 수 있다. 이는 오즈의

카메라가 항시 인물이 떠나간 자리에서 머물고 그 공간이 인물과 얼마나 격리되어 있는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질을 획득하고 있음을 인증하는 선구적 숏을 구사했음 역시 추가된다.


본편이 다시 어머니-딸의 관계로 다시만들기 되거나, 기차 내부의 위치와 시선 숏 혹은

여행숙소 부녀의 잠자리 긴장감을 통한 근친상간 등에 대한 논의들을 경유한 이후 다시

프레임에 주목한다면 두 배우의 인공적이며 과잉되도록 지시화된 연기의 중점에 기분나쁜

클로즈업의 충만감이 있다. 마치 모든 간극의 파생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정좌된 듯 한

인물의 전면으로의 부피감은 정물화된 공간에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의 거짓을 부인하기

위한 준비된 태도처럼 보인다. 밖의 그림자 속 풀잎이 흔들려 실내 꽃병의 공허를 위로하는

것처럼 오즈의 세계는 상실의 밀물 앞에서 고개를 떨꾸는 것을 그리 주저하지 않는다.
5 자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