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국화 이야기(殘菊物語).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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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국화 이야기(殘菊物語).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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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미조구찌 겐지

이른바 '예도(藝道)' 3부작의 하나로, <오사까의 여자(1940)>, <예도일대남(1941)>으로 이어진다

 

영자막을 옮겨 착오가 많을 줄 압니다 

 

Comments

39 범부
감사합니다.
37 보라™
수고하셨습니다.
GIVE 3 MP 42 신동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28 이야호
고맙습니다
48 RainBow
수고하셨습니다! ^^
12 왓쪄네임
잔국물어.. 감사해요!!
26 얼기설기
감사합니다 ~~
31 Cinephile
수고하셨습니다~
GIVE 3 MP S 푸른강산하
감사합니다.^^*

추카추카 2 Lucky Point!

34 진트
수고하셨습니다
28 ll레온
감사합니다
29 불량아이
감사합니다
S 컷과송
2017. 3. 8. 감상

14. 잔국물어 殘菊物語 (1939) : 이분법의 구도 아래 컷은 물러선다.


이분법의 권능은 쉽게 독자의 눈을 멀게한다. 존 포드의 <수색자>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본질주의든 상대주의든 그 어느 쪽에 잠식되든 한순간 이분법은 삶의 평범한 일상에서 부활하고 자신의 좌표에 안착한다.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분법의 매혹은 그 특유의 미학과 강압적인 논법으로 결코 현실에서 유리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의 얼굴은 배우 자신의 가족력에서 게이샤의 자취가 감독의 그것과 공유되었기 때문에 엔딩에서라도 보여질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야마다 이스즈가 주연한 작품들의 엔딩에서 클로즈업된 배우의 얼굴은 기실 게이샤의 초상일게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관객은 본편에서 여주인공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이는 여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녀의 얼굴이 단한번도 클로즈업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본편에서 그녀는 게이샤가 아닌 하인 계급에 속한다. 이것이 전술한
감독의 개인사와 연관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기법적으로 여주인공의 얼굴이 선명하게 프레임을 장악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본편이 멜로드라마나 통속적인 비극 혹은 <잔다르크의 수난>과 같은 얼굴의 서사화에 기대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이다.
직선적으로 말하자면, 여주인공의 얼굴은 그냥 버려진 것이다. 즉, 비극은 알려지는 순간 생명력을 잃게되니 침묵함이 현명하다.

배우의 얼굴이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무수한 영화들을 통해 그들은 스타성을 획득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본편의 보여지지
않는 얼굴은 그 대척점에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미조구치 겐지의 대개의 여성 희생극에서도 유독 본편은 이같은 맥락을
극 내내 단한순간도 흐트러짐 없이 유지한다. 원제의 "殘 잔"은 이같은 본편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진술하고 있다. 왜 여주인공의
얼굴은 보여질 수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엔딩에서 찾을 수 있다. 야마다 이스즈의 얼굴이 중앙 혹은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 프레임을 넘어섰던 바를 기억한다면 본편의 엔딩이 남성 주인공의 일종의 관객 인사에 배정된 변형이 흥미로울 것이다.

게다가, 남주인공 키쿠노스케는 양손을 펼쳐가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대중에게 인사를 보내는 행위를 취하는데, 물론 여기서
그 인사를 실제로 받아야할 이가 누구인지는 신파성의 도식하에서 두말할 나위 없다. 주의할 것은 야마다 이스즈의 두 편에서
그녀는 본편에서와 같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를 만나서 그를 위해서 오롯이 희생하는 캐릭터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녀가
​현실 안에서 남성들의 세계 내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다가 배제당하는 캐릭터였다면 본편은 수난극에서 희생극으로 ​회귀한다.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음은 단순히 클로즈업의 유무만이 아니라 여배우라면 응당 받아야할 조명의 부재를 뜻한다.

굳이 장면을 누설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녀가 재기의 기회를 잡은 남편을 위해 기도할 때, 혹은 성공한 남편과의 신분차를
고려해 지인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를 비롯 거의 모든 장면에서 그녀의 얼굴 근처에는 극 내든 외든 빛이 허락되지 않는다.
보여지지 않음으로서 버려짐에게  햇빛 양 陽이 아닌 그늘 음 陰 만이 가능하다. 이것은 보여지지 않음의 시작이자 끝이다.
하지만, 알려져있다시피 본편의 여주인공인 하인 오토쿠는 단순히 자폐적인 무능력자가 아니다. 그녀의 첫 등장이 아기를
등에 입은 채이며 유모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초반부 그녀가 아기를 침구에 눕히고 모기장을 덥자 프레임 내로 남자주인공
키쿠노스케가 입장하는 장면은 곧  키쿠노스케가 아기임을 증거하고 그를 양육할 능력이 오토쿠에게 있음을 명시한다.

돌아오는 자와 떠나는 자의 이분법이란 웨스턴에서 이미 증명되었듯 전자에서는 성공의 세속적인 쾌감을 부여하고
후자에서는 소멸의 공포를 선사함으로서 이중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포획하는 기법을 도식적으로 사용한다.
대중은 전자에서는 선망의 환타지를 취하고 후자에서는 외면의 현실성을 차마 놓지 못한다. 이것이 이분법의 영토가 영원히
확보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유다. 본편에서 하녀 오토쿠와 도련님 키쿠노스케의 양가적 좌표 역시 이와 동일하다.
당연하지만 놀랍게도 멜로극의 거부될 수 없는 도식성은 오토쿠의 임종에 차마 키쿠노스케를 배석하지 못하게 한다.

​​초반부 키쿠노스케의 못난 연기를 품평하는 이들의 프레임은 전체 중 중간 부분만을 차지하거나 가림막 등으로 완전히
개방되지 않은 한정성을 보인다. 이에 비해 처음으로 키쿠노스케에게 진정한 조언을 하는 이는 실외 촬영의 오토쿠다.
오토쿠와 키쿠노스케의 첫 시퀀스는 초반에 그녀가 키쿠노스케의 뒤에서 걸어갈 때는 카메라가 좌측 아래에서 사선의
건물선을 그리는 듯한 촬영을 지속하다가 그녀가 앞으로 나설 즈음에 정직한 가로선을 유지한다. 이 장면에서 두 인물이
하나의 프레임의 경사도를 어떻게 180도 평면각으로 회복하는지는 이후 그들의 이분법적인 역할 비극의 복선이 된다.

​전작에서 진술한 바 있는 롱테이크는 본편에서는 거의 물리적인 장벽조차도 무시한 트레킹 숏 등과 결합하면서 이미
논증된 바 있는 미조구치 겐지의 일본 영화의 미학성을 구축한다. 불쑥 말하자면 이는 곧 일종의 질김이다. 도무지
단절될 수 없을 것같은 하나의 인연을 공간을 접어버려서라도 유지해야한다는 의지가 본편 내내 긴 화면을 실행시킨다.
하나의 씬이 하나의 시퀀스라고도 해도 좋을 구성들의 연쇄는 그림자와 빛의 일체성을 위해서 이미 내정된 바와 같다.
키쿠노스케가 재기에 성공하여 양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탑승하기 전 오토쿠를 찾는 장면이 가장 대표적이다.

​액션의 생동감이나 일대 소동극에서의 영화 언어인 편집 만능에서의 컷은 인물과 인물, 사건과 사건 사이이 단절됨을
가장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이며 필연적이라는 점을 상기하자면, 롱테이크의 어법에서 가능한 컷이 배제되어야하는
이유는 능히 감지된다. 일종의 모순형용으로 두 남녀는 단절되어야 하지만 차마 롱테이크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 바다.
​조형적으로 따지자면 키쿠노스케는 열림과 닫힘이 교차하는 실내 장면에서는 물론이고 종종 세로의 직선 곁에 머문다.
새출발 하려는 키쿠노스케의 역 대합실에서 그의 등이 기대고 있는 대들보를 정점으로 이같은 선 이미지는 통용된다. ​

​서사적으로 은밀하지만 키쿠노스케에게 현실을 말함으로서 예술가로서의 각성에 이르게하거나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오토쿠의 행위는 희생극 제의에서도 드라마의 고단함을 넘어서는 다소 위험한 일탈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재기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훌륭하게 성취의 길로 연결할만한 키쿠노스케의 연기실력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영화가 선명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전술한 세로의 직선성에서처럼 일종의 예비된 기적처럼 보인다.
문제는 '말함 혹은 청함'이라는 진정한 소통의 화법을 구사한 오토쿠에게는 죽음의 선고만이 예비된다는 점인데, 문득 이같은
미조구치 겐지의 여성 수난/희생극의 관습성이 오히려 세계의 실체를 발설한 이에게 가해지는 징벌처럼 보인다. 그것이 왜
여성인가 그리고 그것은 과연 학문적으로 타당한 관점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미조구치 겐지의 가/피학성을 논의해야할 바다.

​<마지막 국화 이야기>는 멜로 드라마에서 왜 롱테이크의 언어가 빈번하게 사용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실제 증명서이며
그토록 오래 이분법의 매혹이 서사 안에서 생존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지지 않음/보여짐의 이분법으로 발화한 희생제의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