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맥락에서 본편은 네오 리얼리즘과 러시아 형식주의를 모두 만족시켰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가능했던 바는 작금이라면 완전히 반대로 기술했을 도입부 해설 자막의 배치로부터
발생한다. 제목이 명시되기 전 마지막 문장에서 인물의 죽음은 이미 관객들에게 고지된다.
게다가, 그 상황은 영화가 개봉-흥행되는 와중이라는 점에서 이 자막은 최초 개봉판 위에
덧입혀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 선택으로부터 본편은 완전히 다른 미학적 결과를 양산한다.
이와 다른 지점에서 오프닝의 얼굴은 <잔 다르크의 수난> 이전에 이미 잔혹하다. 결국
이는 영화사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인물이 카메라를 응시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인지하면서 다소 기울어진 정면 응시를 한 것인지조차 황망하지만, 인물의 바라봄은
엔딩에서의 카메라의 바라봄/인물의 잠든 얼굴과 상관되면서 본편이 서사에의 욕망을
추구했음을 드러낸다. 여기서 카메라는 본인이 주체임을 선언하고 타자를 선정한다.
본편의 민속지적 성격과 더불어 다큐의 리얼리티, 타자성에의 자만에 관련된 비평은
축적된 바처럼, 지속에의 단절에 대한 지적 역시 언급되었을 것이다. 고정된 카메라의
길게 찍기를 잘게 자르기로 대체한 대부분 장면이 다큐적 존재론을 손상하게 했는가라는
미학적 불신은 엔딩에서 과격한 교차편집을 통해 죽음에의 기의를 도출해낸 몽타주가
표출됨으로서 능히 반론의 권력을 생성한다. 오프닝의 자막은 여기서 다시 부활한다.
수고 많으셨어요.
찾아서 봐야겠군요.
수고하셨어요.
바로 찾아서 감상 들어 갑니다.
감사합니다.
단 평 : 결과로부터의 순응
어떤 맥락에서 본편은 네오 리얼리즘과 러시아 형식주의를 모두 만족시켰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가능했던 바는 작금이라면 완전히 반대로 기술했을 도입부 해설 자막의 배치로부터
발생한다. 제목이 명시되기 전 마지막 문장에서 인물의 죽음은 이미 관객들에게 고지된다.
게다가, 그 상황은 영화가 개봉-흥행되는 와중이라는 점에서 이 자막은 최초 개봉판 위에
덧입혀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 선택으로부터 본편은 완전히 다른 미학적 결과를 양산한다.
이와 다른 지점에서 오프닝의 얼굴은 <잔 다르크의 수난> 이전에 이미 잔혹하다. 결국
이는 영화사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인물이 카메라를 응시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인지하면서 다소 기울어진 정면 응시를 한 것인지조차 황망하지만, 인물의 바라봄은
엔딩에서의 카메라의 바라봄/인물의 잠든 얼굴과 상관되면서 본편이 서사에의 욕망을
추구했음을 드러낸다. 여기서 카메라는 본인이 주체임을 선언하고 타자를 선정한다.
본편의 민속지적 성격과 더불어 다큐의 리얼리티, 타자성에의 자만에 관련된 비평은
축적된 바처럼, 지속에의 단절에 대한 지적 역시 언급되었을 것이다. 고정된 카메라의
길게 찍기를 잘게 자르기로 대체한 대부분 장면이 다큐적 존재론을 손상하게 했는가라는
미학적 불신은 엔딩에서 과격한 교차편집을 통해 죽음에의 기의를 도출해낸 몽타주가
표출됨으로서 능히 반론의 권력을 생성한다. 오프닝의 자막은 여기서 다시 부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