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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평 : 자백된 실패
왜 시작은 탄광이어야하는가라는 질문이 본편 전체를 관통하지 않는가라는 확장은 관객을
난감하게한다. 이는 화가 장르에 대한 할리우드의 재현된 착각보다 오히려 더 난문이 된다.
삶에 대한 욕망이라고 번역할 원제에서 삶의 다양성을 도입부부터 정확히 제기하고 이후
그가 만나는 몇몇 조력자이자 인연들에 대해 기차 등에서의 인사로 이를 쉼표화하는 방식은
단락의 구성으로 인지될 수 있지만, 여전히 어떤 삶에 대해 무엇을 욕망하는가는 미지수다.
지극히 인상주의적 필체에 동의하는 관점이라면 극한노동의 장소가 어떻게 빛의 산란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에 대한 별도의 진술이 필요함에도, 인물은 그저 동생에 의해 구원되듯이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종교는 어느새 예술로 변이되는데, 이 둘의 차이과 공유가
어떻게 인물의 미학적 본령과 일치되는가에 대해서도 서사는 묵묵부답이다. 그저 전술한
장르의 양식화된 오브제와 캔버스의 대차대조표가 착각의 리얼리즘으로 오도될 뿐이다.
배역들은 과잉되고, 이는 오직 익히 알려진 광기의 연쇄와 증폭, 예술가의 논쟁적 자의식을
정형화한다. 본편이 고심했어야할 지점으로서 초반부의 고통받는 삶의 윤리적 체험과 빛이
대상을 변형시키는 시선의 미학의 등식화였음에도 어떤 본능적인 반응도 감지되지 않는다.
관객은 실제 인물의 고뇌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선입관 외에 본편이 스스로
구축했을지도 모를 어떤 세계에 대한 초대를 받지 못한다. 그저 화폭과 신화가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