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들리에 박사의 유언 (The Testament Of Doctor Cordelier, Le Testament Du Docteur Cordelier,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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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들리에 박사의 유언 (The Testament Of Doctor Cordelier, Le Testament Du Docteur Cordelier,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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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 영화는 르느와르 감독이 TV에 출현하여 특이한 사건에 대한 르포를 진행하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파리 교외, 정신과 의사인 코르들리에 박사와 변호사인 졸리는 어린 시절 친구로 같은 지역에서 산다. 코르들리에의 변호사이기도 한 졸리는 '오팔'이라는 낯선 남자에게 전 재산을 상속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하게 된다.졸리는 우연히 한 남자가 어린 소녀를 위협하는 장면을 보게 되고, 쫓기던 그 남자가 코르들리에의 집으로 숨어들었다는 사실, 남자의 이름이 오팔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사람에게 재산을 상속시키느냐는 졸리의 충고에 코르들리에는 오팔이 살아 있는 뇌를 제공하여 실험 대상이 되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때 거리에서 한 행인이 오팔에게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오팔에 대한 단서를 가지고 있던 졸리는 코르들리에의 동료인 세브랭 박사에게 이 일을 의논하러 간다. 코르들리에의 실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고, 그와는 반대되는 이론을 가지고 경쟁 중인 세브랭은 코르들리에를 정신병자 취급한다. 세브랭의 사무실에서 공개적으로 실험을 가지기로 한 날, 오팔이 사무실에 나타나고 세브랭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죽어 있는 세브랭 옆에는, 오팔은 사라지고 코르들리에만 있었다. 오팔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수사는 계속 진행된다. 코르들리에의 집에서 파티가 있던 날, 집에 돌아 온 졸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코르들리에의 관리인 데지레였다. 황급히 달려간 졸리는 코르들리에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하인들은 코르들리에의 연구실에서 나는 신음소리를 더 이상 견딜 수도 없고, 주인의 명령 없이 어찌할 바를 몰라 졸리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연구실 문을 부수고 들어서자 코르들리에는 없고 오팔만 남아 있었다. 코르들리에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여기 저기 뒤져보지만 시체는 없었다. 졸리와 단둘이 대화를 하겠다는 오팔의 부탁으로 하인들은 나가고, 오팔은 테이프를 들려준다. 사회적 규범과 도덕, 인간의 의무, 삶에 있어서의 모든 외부적인 압력에 짓눌린 젊은 날의 코르들리에는 그 반대 급부로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억눌린 악한 본성에 대한 연구 끝에 그는 완전한 악의 본성만 남은 인간으로 변화할 수 있는 시약을 만들어 낸다. 코르들리에의 악한 본성은 약을 통하여 오팔로 변모하는 것이다. 억압된 감정의 해방은 코르들리에한테 자유로움을, 가벼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한 본성을 되찾기가 어려워지고 투여할 약의 양은 늘어만 갔다. 이제 코르들리에는 오팔로서 살아가느냐 치사량의 약을 먹고 코르들리에로 돌아가 죽는냐의 갈림길에 섰다. 졸리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 오팔은 결국 약을 마시고 코르들리에로 되돌아가 죽음을 맞이한다. 신의 영역을 건드린 인간의 최후였다.
코르들리에 박사의 유언 Le testament du Docteur Cordelier (1959)

장 르누아르
 

Comments

추억의 ^^ 감사합니당
S 컷과송
2019. 11. 22. 감상

단평 : 창 밖에 아직 영화가 있다.


감독의 개인 연보에서 극장 3부작 중 종결작인 <엘레나와 남자들>의 3년 후 본편이
제작되었다는 사실보다 주목할 것은 본편이 감독의 유일한 TV 영화 연출작이라는 점이다.
컬러 TV의 프랑스 내 보급 시기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흑백 색상도 주시된다.
더불어, 카메라와 음향 상태 등의 기술적 요인 역시 본편을 감독의 전작들과 차별화된다.
각본과 연출을 모두 담당한 장 르누아르가 프롤로그에서 직접 감독 신분으로 출연하고
해설자 역할을 담당하는 것 역시 기존 영화에서의 그의 배우로서의 몫과 다르다.

본편의 서사 얼개가 1959년이라는 당대에 왜 필요했는가라는 질문은 영화를
이분법적 파훼로 몰아가거나 알레고리로서 영화/TV의 자리를 재배치시키게 된다.
프롤로그에서 굳이 TV 스튜디오 내부의 기술진을 도입시키는 것은 이같은 함의를 굳힌다.
첫 화면 자체가 텔레비전사의 상호를 드러내고, 감독이 '마이크 테스트'를 말하기조차한다.
TV의 영화에 대한 공격, 영화의 영향력에 대한 위기 감지 혹은 가능성이 적대적으로 담겼다.

그럼에도 본편은 인물의 첫 동작으로 문을 여는 행위라는 점은 본격 서사로서의 본능적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에서의 창을 여는 행위와 연결된다. 혹은 제목과 내러티브 상으로
유언장이 결국 문자 그대로 성사되지 못했다는 점은 스크린 영화에 대한 자존심을 지시한다.
감독의 인장인 창을 여는 행위와 이어지는 좁고도 깊은 공간과의 낯선 운명과의 조우가
본편에서는 그것이 밤의 어둠과 어린 소녀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음울하다.

<게임의 규칙>이나 <황금 마차>에서와도 같이 문의 수많은 여닫음의 운동 이미지는
본편에서도 지속되는데, 엔딩에서는 이 문이 단순히 닫혀진 것이 아닌 기물로 막혀있다는
점에서 영화/TV의 이분법의 적대성으로 배치된다. 이같은 맥락에서 엔딩에서 프로이트적인
인물의 죽음이 문을 개방한 이후 배정된 점 역시 시공을 지속시켰던 전작들과의 간극이다.
이것이 영화에 대한 그의 TV로부터의 유언은 아닐지라도, 직선적인 충고로서는 묵직하다.
20 pupukim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