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네티아의 소금(Salt for Svanetia, 1930)

자막자료실

스바네티아의 소금(Salt for Svanetia, 1930)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1579792

삿댓님의 요청자막입니다.


Sergei Tretyakov라는 언론인이 조지아(옛 그루지아)의 오지

스바네티아를 여행하고 쓴 기사를 근거로 만든 다큐입니다.

원래는 극영화로 하려 했다가 다큐가 됐지만,

영화 일부는 연출된 것이라고 합니다.

(전 모든 다큐는 연출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영화는 1930년작이니만큼, 소비에트 선전이 후반부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된 내용은 우쉬굴리 지방의 민족지적 풍습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소련의 '표현주의' 기법이 만발한 무성영화로서,

한 컷 한 컷이 그냥 '예술'입니다.

에이젠슈타인의 편집기술이 연상되지요.


지금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는군요.

Ushguli는 조지아 주 Svaneti에있는 Enguri 협곡의 머리에 위치한 4 개의 마을로 구성된 커뮤니티입니다. 

Ushguli는 어퍼 스바 네티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인정 받고 있습니다.-구글 


연출은 미카일 칼라초도프.


중간중간 러시아어 자막에 해당하는 한글자막이 안 보이는 경우가 있지만,

2,3회에 나눠져 있는 걸 하나로 묶은 경우이기 때문에 빠뜨린 자막은 없다는 걸 밝혀둡니다.

러시아어==>영어==>한국어 중역입니다.





"위 출처는 커뮤니티 '씨네스트'입니다. https://cineaste.co.kr 이곳에 오시면 다양한 피드백과 관련 자료가 있습니다. 아울러 스크립트를 이용한 불펌을 금합니다.

그리고 타 사이트 업로더 여러분께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저작권 문제로 삭제되더라도 가급적이면 퍼가시는 것보다는 링크로 연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Comments

S rayphie
고맙습니다.

추카추카 31 Lucky Point!

S 궁금맨
고맙습니다. ^^
23 까마귀
고생 많으셨습니다~
19 큐담
감사합니다.
29 언제나
고맙습니다.
37 보라™
수고하셨습니다^^
28 이야호
고맙습니다
30 하얀벽돌
고맙습니다.
27 십이야월
감사합니다
20 암수
미하일 칼라토초프가 20대때 만든 다큐이군요.....
이감독의 전성기는 50~60년대......
불후의 걸작 3편을 남기셨죠...<학이 난다,57><부치치 못한 편지,59><소이 쿠바,64>
12 삿댓
고생하셨습니다 ㅠㅠ
아주 예전에 지나가면서 신청했던 작품이었던거 같네요. 신청했는지조차 잊고있었는데..
번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4 umma55
덕분에 건졌습니다.^^
3 가상세계
오~30년대 작품...감사드립니다.
저런 옛 작품들 보고 있으면 기분이 기묘하더라구요.
지금은 다 고인이 되셨을 분들...
24 umma55
90년전 영화라 생각하면 약간 아찔해지죠.^^
GIVE 3 MP 16 TylerDurden
고맙습니다.
13 리시츠키
암수님이 말씀하신 <학이 난다,57><부치치 못한 편지,59><소이 쿠바,64> 이 세 영화들이,
바로 이 감독의 작품이었군요!! (역시 암수님은 인간 필모그라피!! ㅎㅎ)
저도 이 영화들 참 좋아하는 영화인데, 특히 수려하고 아름다운 영상미에 반할수밖에없죠.

러시아(소비에트) 영화는 볼때마다 촬영이나 조명, 편집에서 늘 감탄하곤 하는데,
-영화사 초기부터 자신들만의 영화이론을 스스로 일가를 이룬 전통이 있어 그런듯합니다-
이 영화도 이러한 제 고정관념을 더욱 강화시켜줄거 같습니다^^

그나저나, 러시아어-영어-한국어... 음 역시 번역은 참으로 어려운 경지입니다~ ^^
고생많으셨고, 언제나 생각치도못한 훌룡한 영화 선물!! 늘 감사합니다~~ !!
24 umma55
중역은 문장 자체는 쉬우나, 문맥 파악이 어렵죠.
늘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GIVE 10 MP 1 Vorgo
오 항상 좋은 영화 소개 감사드립니다
S 컷과송
2021. 1. 28. 감상


단 평 : 부딪히(치)면 비로소 잡히는 것들


'히/치'의 어감의 국어학적 차이는 능동과 수동에 있다. 이 경우 구별의 요체는 주체의 가늠이다.
이는 곧 본편의 장르를 단순히 다큐로 분류하는 것의 불결함 혹은 경계의 무화와 구성됨 따위로
편리하게 수집하는 것과 잇닿아있다. 차라리 20년대 이후 소비에트 영화에 인물의 중심성이
불가하다는 것을 언급하는 편이 이념적으로 당연하겠지만 역/사적일 수 있다. 뒤집자면 거기에는
누구도 홀로됨이 불가하여야한다는 집단으로서의 부곽이 놓여있다. 그럼으로 얼굴은 전체다.

몽따쥬는 마냥 동의될 수는 없다. 부정의 자리가 진정으로 부정되어야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수반된 이후에도 이는 쉬이 흔적으로 소멸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여기에는 에세이가 도달하지
않았고 민속지와 이분법의 선명한 동력만이 충만할 뿐이다. 거의 모든 숏은 카메라의 활력과
구도의 공격성, 얼굴들의 지배력으로 획정된 데꾸빠쥬다. 감성의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각 숏은
자신의 탁월함에 대해 어떠한 모호함도 허가하지 않고 관객을 호명하며 그 내부에 소속시킨다.

문제는 이에 대한 후인의 동의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의 변형과
신조류의 부상 때문만은 아니다. 강렬한 인상으로서의 프레임들이 매순간을 승천시키는 가공할
카메라가 주창한 리얼리티는 환영되어야하는가에 논쟁의 여지가 있다. 실제 거기의 숨결과 노동이
관객 자신의 자리를 보장하기를 거부한 채 막강한 확대로 보여지기만 할 때 독해는 어디에 존재할까
어쩌면 이야말로 본편의 결말이 선전의 박차로 종결되어야하는 내재적 사유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