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면류관의 별(Stars In My Crown, 1950)

자막자료실

내 면류관의 별(Stars In My Crown,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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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러님이 오래전에 요청하신 자막인데 

뒤로 밀렸다가 이제사 나왔습니다.


영화 제목은 19세기 찬송가인데,

영화 내내 주인공 목사(조엘 맥크리어)가 애창하는 노래입니다.

가사를 찾아봤더니,


나는 오늘 그 아름다운 땅을 생각하네
언젠가 해가 지면 갈 그 땅을 지금 생각하네
주님이 주신 은혜로 내가 그곳에 설 때,
내 면류관에는 별들이 반짝일까? 


해가 지고 저녁이 올 때,
내 면류관에는 별들이 반짝일까?
내가 쉴 거처에서 깨어날 때,

내가 쓴 면류관에는 별들이 반짝일까? 


주님의 능력으로 나는 수고하고 기도하네
나도 그날 다른 승리자와 같이
그날 영광스런 날에 내 면류관에 있는 별들을 보겠네
그들과 같이 큰 바다 물결같이
그분을 찬양하겠네 


아, 그분의 얼굴을 볼 때 그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 

내 면류관의 반짝거리는 보석이 있다면,
그 보석을 그분의 발 앞에 내려놓아야지!
그렇게하면 아마도 금으로된 그 도시에서 내가 누리는 기쁨이 넘치고 넘치겠지. 


즉, 목회자로서 수고하고 죽은 뒤(^^)

주에게 인정받겠다는 다짐이라고 하겠네요.

영화 속 목사가 애창할만한 노래입니다;)


가상의 마을이지만 배경은 남부 어느 곳쯤의 작은 마을이고,

복선 따위는 없이 목사를 중심으로 그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내용이 '너무 이상적'이라고 느꼈습니다.

뭔가 감동을 주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고나 할까요.

현실감이 많이 떨어집니다.

KKK단이 설치는데 마을에 보안관은 콧빼기도 비치지 않고

목사가 홀로 맞선다든지,

멀쩡한 마을에 의사도 있는데 교회가 없다든지

(목사가 새로 와서야 교회와 목사관을 짓는다니...^^)

학교 아이들과 선생이 장티푸스에 걸렸는데도

학교 우물을 조사하지 않는다든지...(그 마을의 영혼과 몸을 책임?지고 있는 의사와 목사, 둘 다)

이야기 구조를 위해 개연성을 희생시킨 예로 보입니다만,

어쨌든 영화는 부드럽게 흘러갑니다.


조엘 맥크리어가 가장 좋아하는 출연작이라고 합니다.


아역의 대명사 딘 스톡웰이 연기도 잘하고 아주 귀엽습니다.

흑인 농부 역의 Huano Hernandez 연기도 무척 좋습니다.


영화제목은 찬송가 가사를 보고 제가 붙였습니다.

구글에도, 네이버에도 한글제목이 없네요.

자끄 뚜르니에 영화 번역이 그러고 보니 두번째네요,

<케년 페시지> 이후로.

전 이분 영화 중 <Out Of the Past>가 좋았습니다.



싱크가 들쑥날쑥이길래 수동으로 맞췄으나

역시 수동은 수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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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9 소구스
감사합니다
5 혀니마세상
감사합니다^^
10 넘조아
잘 보겠습니다.
S 컷과송
2022. 4. 30. 감상

단  평 : 어긋남이라는 신뢰

어디까지라는 경계보다 어떻게라는 가능성이 먼저 제기될 수 밖에 없다. 공동체 장르에서
마을이 과거적으로 제기됨은 그것이 현재적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할 과잉과 왜곡의 포장을
의심하도록 유도한다. 그 목소리의 주체가 소년일 경우에, 더 나아가 그가 본편에서 끝내
성인으로 등장하지 않는 경우에 이같은 의혹의 시선은 더해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모든
본편의 장소에 소년이 편재하지 않고 가끔 나레이션조차 부재할 때 서사는 신뢰를 잃는다.

하지만, 이 정도는 장르성으로 대변될 수 있다. 본편의 본질은 구심력을 주체로 함에 있어,
즉 아무도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선의의 울타리를 어떻게 지켜내는가에 있다.
이 지점에서 의사가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시선으로 대면하기 전에 화면 중앙으로
기차가 가로막고 지나가는 동안 특정한 누군가가 기차에 탑승하지 않는 화면은 오프닝의
목사가 기차에서 내리는 동작을 보여주지 않는 것과도 같이 철저한 방어망이라고 해야겠다.

그렇다면 이같은 철벽이 본편을 공동체의 신화에 봉헌한 텍스트라고 단정하게 할수 있을까?
의도적으로 에피소드가 파편화되었다는 것은 스타일상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각
사건의 닫힘이 왜 가능한지를 초월적으로 무마시켰다는 지점이야말로 본편을 어긋나게한다.

가령, 목사가 권총을 꺼내고 첫 설교를 하거나, 채찍으로 한 남자를 진창에 빠뜨린다든가
최종적으로 백지 설교에 두건을 쓴 군중이 의지를 버리고 분산되는 순간에 이를 때까지
모든 것은 도무지 그 근저를 어디에서 찾아야할지 고의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채 하나의
공동체적 윤리를 내재한 채 호명된 요인처럼 수행한다. 거기에 예외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목사가 외부로부터 온 해방자가 아니라, 이미 마을 내부에 하나의 공기가 존속했다.

논점은 마지막 교회의 예배 창문 밖으로 흑인 노인은 낚시를 하러 나가고, 그를 위협한
자본가는 찬송을 부르는 미진한 이분법에 있지 않다. 혹은 느와르 전작에 이어 더 이상
식민의 역습과 모든 인물의 존재부각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에도 미칠 수 없다.
이를 종교성으로 볼 것인가? 즉, 순교자의 가시면류관을 왕관이라고 지칭한다면 그 위에
별이 있다 찬양한다면 이것은 일종의 결정론 내 자유의지의 상황극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용해되지 않은 채 순화되는 순간에도 이를 거역할 수 없는 공동체는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