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에 대해 '무빙 픽쳐'나 <붉은 강 Red River>를 언급함은 한편으로는 정체성을 찬양함으로서 오히려
장벽의 제한을 부각시키는 의도치 않은 비난에 고립되는 결과를 낳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라울 월시와
클라크 게이블이라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대의 명인들의 고별가로 기록하면서 작품 전체를 하나의
애도사나 씻김굿으로 명명함인데, 이는 영화가 직면하는 낭만적 거짓에서 리얼리즘을 낯설게 만든다.
전자에서 관객은 오직 '돌진'한다는 주제어 아래 영화가 움직임이라는 이미지를 어떻게 과대 포장하여
프레임화했는가를 영화사 초기를 상기하면서 본편의 위치를 일종의 계보학에 계열체로 지정할 것이다.
후자는 할리우드 영화사적 감상주의에 젖어들며 이들의 황홀했던 시기에 대한 동의를 생성하면서
영화사적 신화에 부담과 견제 없이 조용히 안착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실제 카우보이와 웨스턴의
그들이 전혀 접합되지 않는 간극을 영화가 어떻게 포장했는가의 진술과도 같은 맥락의 부드러움이다.
서사에 집착한다면, 기이하게도 왜 초반부 거인과 그의 형제는 강도 행각을 감행하는가라는 질문이
돌출되는데, 이는 뒤집어 말하자면 그것이 그들에게 하나의 기회이자 자격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그
행위는 서사 전체를 전혀 얼룩지게하지 않고 소멸된다. 말하자면, 추락함으로서 그 높이가 부여된다.
라울 월쉬의 영웅주의에는 고독 따위는 스며들지 않고, 가족-집 등의 감정적 정주의 자리 역시 부재하다.
그의 행위 아래 놓인 인물과 공간은 무조건적인 긍정성을 배정받은 후 도무지 장애 따위를 설정함 없이
그야말로 순응할 뿐이다. 거인은 실제로 신이며 거대한 대륙 자체를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내재하면서
최종적으로 도덕을 설교할 수 있다. 여성이 남성의 도움으로 부츠를 벗는 동작의 반복은 또다른 그녀의
상징은 이부자리와 합쳐져서 누가 대지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약호로서 희극을 구축한다.
거인의 꿈은 의외로 초라하고, 이는 자본주의의 저열한 술수 밖에서 다시한번 교훈의 신격을 시전한다.
결국 본편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서 꿈들을 동반하고 재귀함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고전 신화다.
클라크 게이블과 제인 러셀도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나왔었지요.
월쉬 영화 중에서도 종종 생각나는 영화였는데 자막 업로드 감사합니다.
단평 : 신화는 얼룩을 무시한다.
본편에 대해 '무빙 픽쳐'나 <붉은 강 Red River>를 언급함은 한편으로는 정체성을 찬양함으로서 오히려
장벽의 제한을 부각시키는 의도치 않은 비난에 고립되는 결과를 낳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라울 월시와
클라크 게이블이라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대의 명인들의 고별가로 기록하면서 작품 전체를 하나의
애도사나 씻김굿으로 명명함인데, 이는 영화가 직면하는 낭만적 거짓에서 리얼리즘을 낯설게 만든다.
전자에서 관객은 오직 '돌진'한다는 주제어 아래 영화가 움직임이라는 이미지를 어떻게 과대 포장하여
프레임화했는가를 영화사 초기를 상기하면서 본편의 위치를 일종의 계보학에 계열체로 지정할 것이다.
후자는 할리우드 영화사적 감상주의에 젖어들며 이들의 황홀했던 시기에 대한 동의를 생성하면서
영화사적 신화에 부담과 견제 없이 조용히 안착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실제 카우보이와 웨스턴의
그들이 전혀 접합되지 않는 간극을 영화가 어떻게 포장했는가의 진술과도 같은 맥락의 부드러움이다.
서사에 집착한다면, 기이하게도 왜 초반부 거인과 그의 형제는 강도 행각을 감행하는가라는 질문이
돌출되는데, 이는 뒤집어 말하자면 그것이 그들에게 하나의 기회이자 자격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그
행위는 서사 전체를 전혀 얼룩지게하지 않고 소멸된다. 말하자면, 추락함으로서 그 높이가 부여된다.
라울 월쉬의 영웅주의에는 고독 따위는 스며들지 않고, 가족-집 등의 감정적 정주의 자리 역시 부재하다.
그의 행위 아래 놓인 인물과 공간은 무조건적인 긍정성을 배정받은 후 도무지 장애 따위를 설정함 없이
그야말로 순응할 뿐이다. 거인은 실제로 신이며 거대한 대륙 자체를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내재하면서
최종적으로 도덕을 설교할 수 있다. 여성이 남성의 도움으로 부츠를 벗는 동작의 반복은 또다른 그녀의
상징은 이부자리와 합쳐져서 누가 대지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약호로서 희극을 구축한다.
거인의 꿈은 의외로 초라하고, 이는 자본주의의 저열한 술수 밖에서 다시한번 교훈의 신격을 시전한다.
결국 본편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서 꿈들을 동반하고 재귀함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고전 신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