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즈코 (杏っ子, Little Peach, 1958) 나루세 미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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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즈코 (杏っ子, Little Peach, 1958) 나루세 미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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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하루 - blog.daum.net/haruda


하루 님께 감사드립니다


무로 사이세이의 소설이 원작입니다 


ps. 혈압이 안좋으신 분들은 관람을 자제해 주세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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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9 불량아이
고맙습니다
16 o지온o
감사합니다.
39 범부
고맙습니다.
37 보라™
수고하셨습니다^^
13 자강두천
감사합니다
28 이야호
고맙습니다
40 백마
고맙습니다^^
24 umma55
무척 보고 싶었던 영환데, 정말 고맙습니다~
14 스눞
경고 : 보시다가 뒷목을 잡고 쓰러지실 수도(특히나 엄마 님은 ㅋ) 있습니다.
^__^
24 umma55
앗???!!!!!
21 에릭카트먼
스눞 님 너무 겁주시는 것 아닙니까?? ㅎㅎ

아름다운 이야기 입니다 걱정마세요^^
즐감하세요~
14 스눞
2 애니홀
감사합니다
22 인향
고맙습니다.
22 시간의항해
감사합니다.
3 꿈이있기에
감사합니다
20 암수
교코의 남편 열등감 참...........교코는 사랑입니다....
S dreammaker
고맙습니다.
23 십리바우
감사합니다.
27 십이야월
감사합니다
8 Minor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4 싸잉
감사합니다
S 컷과송
2021. 6. 2. 재감상

단 평 : 자전거가 왔(을 뿐이)다.

본편의 거죽에 대한 두 가지 시선 중 전술한 글에서 충분히 소명하지 못했던 지점부터 기술한다면,
<산의 소리>와 본편은 며느리-딸의 혈연성의 차이만큼이나(근친상간을 본편에 대입함은 과잉적이다.)
서사 결말을 달리 함으로서 두 작품 사이의 시대적 간극을 드러낸다. 떠남과 돌아감은 선택이라는 표피를
넘어서 엔딩에서와도 같이 주체가 누구와 혹은 홀로 뒷모습을 관객에게 전시하는가의 구분을 강요한다.
여기서 (시)아버지의 좌표는 경청의 간접적 유도와는 달리 '끝'을 발설함으로서 관찰하는 자리로 변이된다.

두번째 지점은 전작 <야성의 여인>과 동잏한 맥락에서 위 글에서는 소환하지 않았던 당대 일본 영화의
새로운 흐름이나 혹은 50년대말의 일본 사회를 무대 위로 올림에 있다. 전작의 폭력이 본편에서 자전거로
대표되는 작은 속도감과 더불어 집 내부에서의 주취와 자괴감으로 장악될 때 여기에는 두 인물의 관계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불신을 축조한다. 결혼이라는 선택에서조차 정확한 의지가 표명되지 못할 때 이를
단순히 감독 세계의 현현으로 축소하기보다는 당대 사회 혹은 태양족 영화에 대한 폭언으로 해제하게된다.

남성은 물론 여성조차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안에서 집을 오가는 행위로 동선을 제한시킬 때 여기서 문득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인가로 질의가 솟구친다. 전작 <야성의 여인> 역시 영화에 대한 의견을 표명했듯
본편 역시 소설가라는 지위 하에 부부가 "그 눈을 치워"라는 언쟁과 사각틀의 창을 통해서 은근히 새로운
영화가 되지 못하는 사위와 소설가의 지위를 누리는 장인 사이에서 아내/딸의 관객이라는 자리를 이중적인
분열 아래 가학적 속박을 수행하는 영화의 내외를 발견한다. 그 때 자전거를 뒤로 돌리지 말아야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