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Lonesome,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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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Lonesome,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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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으로 멘탈 붕괴된 심정을 휘영청 밝은 힐링 로맨스 고전으로 달래보고자 

그 20년대 걸작으로 손꼽힌다는 <Lonesome>(1928)을 4번째 번역작으로서 선택했습니다.

영화는 예상대로 좋네요. 제목은 '고독'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외로운'이라고 수식어만

딱 있는 게 더 여운있게 느껴지네요.

마치 해롤드 로이드의 놀이동산에 빠져드는 <스피디>에서 더욱 컬러풀해진 화면과 그 무서운 소재가 빠진, 무르나우의 걸작

<선라이즈>의 결합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친 현대인의 일상을 감화시켜주는 산뜻함이

영화 속에 환상처럼 잔재해있지만 반대로 현기증 나고 애타게 만들기도 합니다. 

데이미언 셔젤의 <라라랜드>에게 영향력을 끼친 것 같기도 하고 소피아 코폴라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도 떠오르는데 후자 같은 경우는 감독님이 못 보셨을 듯 하네요.


명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의 100대 인생영화 중의 하나로 이 작품을 알게 되었어요.

영화 산업에서 격동의 해였던 28년도에

유니버셜 픽처스의 가장 비싼 영화였다고 합니다. 부다페스트 출신으로 미국에 정착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재능을 발휘한 페조스 감독은 이 영화로 박스오피스에서 히트를 쳤지만

1941년에 영화 제작을 중단하고 비영리재단의 책임자이자 인류학자로 거듭났다고 하네요.


로젠봄은 이 영화가 소리가 들어오기 전에 무성영화의 예술성이 특정한 완벽한 표현을 만난 영화 중에

이 작품이 모범 예시에 든다고 평했습니다. 그는 팔 페조스의 영화들이 프랑스 인상주의에서 독일의

표현주의를 거쳐 러시아의 몽타주 기법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풍부한 유산과 미국영화 제작 스타일과

에너지가 결합된, 완전한 혼합물을 보는 것 같다고 칭찬했습니다. (비슷한 예로, 킹 비더 감독의 <군중>,

무르나우 감독의 <선라이즈>,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월터 루트만의 <베를린> 같은 시적이고 대도시가 나오는 영화들)


그의 말을 더 살펴보면, 페조스는 대도시의 일상적인 사회경험에 대한 복잡성을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그의 어프로치는 분석적이며, 진보적이고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때로는 비판적이거나 

희극적이면서 거리감이 있고 애정이 많은 방식을 취한다고 합니다. 그 시기에 이름이 알려진 배우였던

글렌 트라이온과 무명이였던 바바라 켄트를 기용하고 오직 3페이지짜리 개요를 가지고 작업에 들어선

감독은 할리우드의 특색인 아침의 숨가쁜 주인공들의 분리된 궤적을 가슴 아픈 조화를 이루는 시각적

푸가로 바꾸어 놓는 영리함을 가졌다고 합니다. 또한, 이 영화는 처음으로 딥틱 효과가 적용된 러브 스토리로서

기념비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글을 기고한 바 있습니다.


즐감하세요! 대륙을 다른 데로 옮기게 된 5번째 번역예정작도 이미 확정해두었는데 재밌을 것 같습니다.^^ 

엔딩 크레딧의 그 부분들까지 다 번역해둬서 끝까지 감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절절해지는 노래...



P.S. 번역은 이번에도 화면 속 대사들을 위한 영문 자막만 지원 안 해서 또 다시 유럽어 

자막을 바탕으로 깔고 번역했습니다. 크로스체킹의 비애^^

며칠 전 자막 번역이 막 내리자마자 다음날부터 벌써 후속편이 개봉된 "꼭 그렇게 자막 배제해야 속이 시원했습니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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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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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인향
고맙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월터 루트만의 <베를린: 대도시의 교향악>(1925)을 보다가 깜짝 놀라서 <선라이즈>, <군중>의 장면들을 다시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대도시를 묘사하는 방식이 너무도 유사해서 1920년대 중반에 이런 방식이 유행이었나라는 생각마저 들게 되더군요.
1927년에 사운드가 스크린에 들어오기 직전에 무성영화는 평생 울지 않던 백조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백조의 노래'를 불렀던거지요.

그러니까 토키 영화가 도착하기 전에 스크린은 이미 사운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던 것이지요.
1927년을 전후한 이 시기, 무성영화 시대는 엄청난 표현력 발전으로 사람들은 귀가 아니라 눈으로 소리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미지 학자 레지스 드 브레가 어디선가 '칼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는 무성영화가 아니라 유성영화의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것도 이런 맥락과 통하는 것 같습니다.

폴 페조스는 연극보다 회화에 관심을 두었던 감독으로 그의 영화는 스토리보다 시각적 표현력을 더 중시했지요.
<론썸>은 개봉당시 찬반양론이 많았던 작품이지요.
후대에도 앤드류 새리스 같은 평론가도 시무룩한 평가를 하기도 했으니까요.
이 영화에 대해 가장 적극적인 평가를 한 사람은 위에 소개하신 1987년에 글을 쓴 조너선 로젠바움이었습니다.

저도 로젠바움의 글로만 알고 있었는데 소서러님의 정성스런 번역으로 백조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꾸벅~
13 소서러
이번에도 유익한 글 고맙습니다. 이번에도 몰랐던 새로운 뒷배경과 지식을 배우게
마음이 알차네요. 평생 울지 않았던 백조의 마지막 노래라... 영화 역사을 감명깊게
눈도장 찍게 되는 대목입니다. <외로운>은 인지도가 지금보다 더 높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새리스 평론가가 나름 과감하게(?) 평가했군요. 이 분은 수많은 감독들 등급을 분류한 시도가 참 대단했죠..
많이 배우고 갑니다~
4 히토천사
귀한자료 너무 감사합니다
S 컷과송
2021. 7. 7. 감상

단 평 : 겹쳐진다는 것

기존 평문, 영화사적 흐름에서의 비견, 당대의 영화 이론적 기법에 대한 재론은 생략해야겠다.
나약한 관객은 로맨스로 출발하여 21세기의 동 장르와 공간-유원지-를 본편에 대입시키는
기분 전환에서 정지하게된다. 1인 가구의 노동자만이 시도 가능한 '주말' 환타지가 관객의
주의를 의식하여 평행 교차되는 한 지점을 생략(초반부 출근에서의 계단)할 때 그 틈을 기어코
메워야만한다는 의지를 중반부 해변에서의 밤의 연극적 무대를 통해 완성해내고야 만다.

몽따쥬보다는 이중인화로서의 장치가 초반부 시간 아래 노동의 일상을 감시할 때 두려운 것은
그것이 외부에서 내부를 억압하는가에 있다. 이는 마치 제목 'Lonesome' 아래 영화가 단순한
이야기 너머의 매체로서 정서를 촬영할 수 있는가를 문답하는 상황에서 이를 성공해야한다는
의지를 축적해나가는 과정과도 같다. 다르게 말하자면, 시간이 사라지는 지점부터 환타지는
시작될 수 있듯이, 인물들은 창 밖의 이동하는 차량의 연주를 시청함으로서 신세계와 접촉한다.

그 출발에 인물의 외면을 뒤덮는 각종 장식물이 시야를 가려야함이 당연하다면, 다시 이중인화로
카메라를 든 낯선 남성이 등장함은 명징의 선을 넘는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다시 시작됩니다라는
표지는 이제 로맨스 장르의 목적인 두 인물/세계의 중첩을 위해 허위를 번복하고 -그 곳은 해변-,
놀이 공원의 속도감과 인파의 분리력을 경유하여 재차 수미상관으로 1인의 계단만을 전시한다.
무성과 유성을 오가는 필름은 '들림'의 '봄'으로서의 도달하여 드디어 시간 밖의 겹침을 완성한다.
고맙습니다!!!
11 아라태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