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들(Four Sons,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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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들(Four Sons,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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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미시계있고님의 요청자막(?)입니다. 

존 포드의 무성영화입니다.


독일 바바리아 지방이 배경이고(영화 속 마을은 실제로는 색슨 지방),

일차대전이 시대배경입니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네 아들을 둔 과부의 이야기지요.

플롯의 우연성이 좀 걸리긴 합니다만, 20년대 영화니까요.

보다 보면 크게 거슬리지 않습니다.


사악한 소령 역을 한 배우는 살을 엄청 뺐다고 합니다.

어머니 역을 한 마가렛 만의 연기가 뛰어납니다.


번역하면서 독일어 고유명사는 대부분 한글발음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정확한 독일어 발음을 모르니까요. 

보시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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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8 이야호
고맙습니다
37 보라™
수고하셨습니다^^
29 불량아이
감사합니다
4 소주맥주
감사합니다
27 십이야월
감사합니다
4 영화나볼래
감사합니다 ^^
16 거상
감사합니다~
14 스눞
이제야 댓글 남깁니다.
이런 영화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배우는 게 참 많은 곳입니다, 시네스트는. ㅎ

엄마 님, 그리고 그 외 시네스트의 영화광들을 알게 된 것이
근래 제가 가장 잘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기온이 뚝 떨어졌네요.
부디, 옥체 보전하시옵소서~!
24 umma55
이런 영화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배우는 게 참 많은 곳입니다, 시네스트는. ㅎ==>2
스눞 님, 그리고 그 외 시네스트의 영화광들을 알게 된 것이
근래 제가 가장 잘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2^^
GIVE 3 MP 16 TylerDurden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S 컷과송
2020. 3. 26. 감상

단평 : 공동체가 (아버지의 언어 없이도) 들어왔다.


보수적이거나 혹은 종교적이거나. 앞선 단어들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34살의
 존 포드를 말하기에는 그의 무성 영화 시절 자료를 현재 거의 접할 통로가 없다.
차라리 그 자리에 1890년대생 동년배들의 세계를 들춰보는 것이 당대의 그가 조망하려한
 세계가 무엇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1894년 동년생인 장 르누아르는
1928년 같은 해 <성냥팔이 소녀>, 조세프 폰 스턴버그는 <최후의 명령>을 연출했다.

윌리엄 A. 웰먼 <삶의 구걸>, 세르게이 M. 에이젠슈타인 <10월>, 알프레드 히치콕
<하숙인>, 에른스트 루비치 <러브 퍼레이드>, 칼 데오도르 드레이어 <잔 다르크의 수난>,
프리츠 랑 <메트로폴리스>, F. W. 무르나우 <일출> 등이 1927년~29년 사이에 제작되었다.
​이 화려한 목록에서 서사의 표피상으로 이웃화되는 것은 <최후의 명령>인데, 이 작품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러시아 장군이다. 근대/현대, 역사/영화의 대립쌍에서 인물은 결국
 재현된 과거 안에서 소멸된 반대편의 본편에는 인민의 어머니와 가족-마을 공동체가 있다.

존 포드는 설사 그 곳이 제국주의 전쟁 치하 시골 마을이라 하더라도 그 공간을 망설임없이
 공동체화한다. 유성 영화 이후 초중기에서 그의 공동체가 웨스턴이든 아니든 파괴되거나
 부정된 것을 상기한다면 본편에서의 공동체는 끝끝내 보존된다는 점에서 축제 시퀀스의
 경이가 남다르다. 네 아들 중 세 아들이 전사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들을 과거-현재의
 유령으로 모친과 식탁에 존재하게 함으로서 염원의 종교적 희구를 지속한다. 여기에 과연
<최후의 명령>과 같은 근대/현대가 대입될 수 있는지는 의문인데, 왜냐하면 세 아들의
 죽음과 모친의 미국 이민에도 그 곳의 공동체는 여전히 유머를 품은 채 지속하기 때문이다.

즉, 어디에도 공동체는 있다. 굳이 국가-아버지의 언어를 모친이 거부한다고 해도 최후의
 가족 공동체는 난로가에 보존되어야한다. 전술한 당대의 작품들과 비견하건데, 이같은
 캐릭터화된 유머의 공동체는 전간기의 대공황이 아직 도래하기 전의 희망가에 다름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이같은 공동체는 30년대 유성영화의 존 포드 스스로가 재구성하기를 거부하고
 관객은 다시는 본편의 캐릭터로서의 공동체의 지속과 마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6 hwanhoo
좋은 자막 감사드립니다...
10 넘조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