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미시계있고님의 요청자막(?)입니다.
존 포드의 무성영화입니다.
독일 바바리아 지방이 배경이고(영화 속 마을은 실제로는 색슨 지방),
일차대전이 시대배경입니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네 아들을 둔 과부의 이야기지요.
플롯의 우연성이 좀 걸리긴 합니다만, 20년대 영화니까요.
보다 보면 크게 거슬리지 않습니다.
사악한 소령 역을 한 배우는 살을 엄청 뺐다고 합니다.
어머니 역을 한 마가렛 만의 연기가 뛰어납니다.
번역하면서 독일어 고유명사는 대부분 한글발음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정확한 독일어 발음을 모르니까요.
보시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기를 희망합니다^^)
"위 출처는 커뮤니티 '씨네스트'입니다. https://cineaste.co.kr 이곳에 오시면 다양한 피드백과 관련 자료가 있습니다. 아울러 스크립트를 이용한 불펌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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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화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배우는 게 참 많은 곳입니다, 시네스트는. ㅎ
엄마 님, 그리고 그 외 시네스트의 영화광들을 알게 된 것이
근래 제가 가장 잘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기온이 뚝 떨어졌네요.
부디, 옥체 보전하시옵소서~!
배우는 게 참 많은 곳입니다, 시네스트는. ㅎ==>2
스눞 님, 그리고 그 외 시네스트의 영화광들을 알게 된 것이
근래 제가 가장 잘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2^^
단평 : 공동체가 (아버지의 언어 없이도) 들어왔다.
보수적이거나 혹은 종교적이거나. 앞선 단어들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34살의
존 포드를 말하기에는 그의 무성 영화 시절 자료를 현재 거의 접할 통로가 없다.
차라리 그 자리에 1890년대생 동년배들의 세계를 들춰보는 것이 당대의 그가 조망하려한
세계가 무엇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1894년 동년생인 장 르누아르는
1928년 같은 해 <성냥팔이 소녀>, 조세프 폰 스턴버그는 <최후의 명령>을 연출했다.
윌리엄 A. 웰먼 <삶의 구걸>, 세르게이 M. 에이젠슈타인 <10월>, 알프레드 히치콕
<하숙인>, 에른스트 루비치 <러브 퍼레이드>, 칼 데오도르 드레이어 <잔 다르크의 수난>,
프리츠 랑 <메트로폴리스>, F. W. 무르나우 <일출> 등이 1927년~29년 사이에 제작되었다.
이 화려한 목록에서 서사의 표피상으로 이웃화되는 것은 <최후의 명령>인데, 이 작품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러시아 장군이다. 근대/현대, 역사/영화의 대립쌍에서 인물은 결국
재현된 과거 안에서 소멸된 반대편의 본편에는 인민의 어머니와 가족-마을 공동체가 있다.
존 포드는 설사 그 곳이 제국주의 전쟁 치하 시골 마을이라 하더라도 그 공간을 망설임없이
공동체화한다. 유성 영화 이후 초중기에서 그의 공동체가 웨스턴이든 아니든 파괴되거나
부정된 것을 상기한다면 본편에서의 공동체는 끝끝내 보존된다는 점에서 축제 시퀀스의
경이가 남다르다. 네 아들 중 세 아들이 전사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들을 과거-현재의
유령으로 모친과 식탁에 존재하게 함으로서 염원의 종교적 희구를 지속한다. 여기에 과연
<최후의 명령>과 같은 근대/현대가 대입될 수 있는지는 의문인데, 왜냐하면 세 아들의
죽음과 모친의 미국 이민에도 그 곳의 공동체는 여전히 유머를 품은 채 지속하기 때문이다.
즉, 어디에도 공동체는 있다. 굳이 국가-아버지의 언어를 모친이 거부한다고 해도 최후의
가족 공동체는 난로가에 보존되어야한다. 전술한 당대의 작품들과 비견하건데, 이같은
캐릭터화된 유머의 공동체는 전간기의 대공황이 아직 도래하기 전의 희망가에 다름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이같은 공동체는 30년대 유성영화의 존 포드 스스로가 재구성하기를 거부하고
관객은 다시는 본편의 캐릭터로서의 공동체의 지속과 마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