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댓님의 요청자막입니다.
미국 감독이 영국을 배경으로 만든 소품 스릴러인데,
짭짤하게 재미납니다.
영화의 교훈은?
정모씨처럼 '자식을 너무 사랑하면 안 된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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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전혀 땡기지 않았어요.^^
쉽게 접하기 어려운 감독의 작품 감사합니다.
이 감독은 그리 인지도가 높은 인물은 아니지만 아직 한국전쟁이 휴전되기 전에 '장진호 전투(Retreat, Hell!, 52) 라는 영화를 연출했다는 점이 독특한 이력이지요.
단 평 : 원본이 없다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본편은 환영받을 수 있을지 망설여진다. 내부/주체와 외부/조력의
결과로서 음모가 파괴된다고 할지라도, 애당초 주체 자체가 텅 비어있다면 회복이라는
단어가 적절할 리 없다. 단순한 해피엔딩으로서 남녀 결합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서도
결국 인물이 자신의 터를 찾지못했다는 점은 부정될 수 없다. 인물은 월세집과 납치당한
교외의 저택을 제외한다면 그녀 스스로의 공간을 구축하지 못했음을 상기해야만한다.
본편의 장르적 변곡점으로 인물이 저택 내부의 비밀 통로를 발견했다는 점을 위 맥락에서
과장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속임수로 쇠창살을 직접 걷어내는 행동 또한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 두 가지 해방적 출구가 너무도 간단히 제기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가 인물의 장소가 되지 못한다는 지점에 있다. 그 사유는
저택의 원 주인의 흔적이 전혀 제시되지 않을 때 그 장소는 유령조차 되지 못함에 있다.
여기서 착안할 때 동 장르의 주류 중 하나인 <레베카>이다. 동형이든 아니든 대리자로
하나의 장소에 진입할 때, 해당 장르의 규정은 원 주인의 분위기가 후속자를 구속함에
은밀한 쾌락을 제공한다. 경계와 모방을 오가는 고전 시학의 원천적 논점을 반복하며
대리자는 자신이 누구일 수 있는가를 번민하는데, 본편은 이같은 장르의 속성을 완전히
거부하면서 장소 자체를 무화시킨다. 단지 그 장소는 허위로 기입될 뿐이며, 인물은
원본으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으며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그저 재빨리 그 곳을
빠져나와 자동차라는 이동 공간에 만족할 뿐이다. 누구도 원본을 찾으려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