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아나의 밤 (The Night Of The Iguana, 1964)

자막자료실

이구아나의 밤 (The Night Of The Iguana, 1964)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1311779

 

10년전 쯤 아는 지인이 제 요청으로 제작했던 한글자막입니다.

이미 DVD 출시도 5년전쯤 되었고(동일 자막 활용일지도 모르지만)

오래도록 자막이 안 올라왔고 요청하는 분도 있는 영화이니

엄미님께 제가 제작중지 요청한 영화중 하나이기에, 올려드립니다.


대사량이 어마어마할 정도로 방대해서 아마 어지간한 분은 손댈 엄두를 못 낸 영화일 것입니다.

(테네시 윌리암스 영화가 다 그렇죠) 유명배우가 많이 출연하는데 국내 미개봉작이지요. 좀 문제될 장면도 있고 해서.

감독은 뭐 '말타의 매'를 비롯해서 정말 많은 명작을 남긴 거장 존 휴스턴이지요.  3대가 영화인 집안인.


여기 리처드 버튼을 유혹하는 10대 후반 소녀로 등장한 여배우는 바로 스탠리 큐브릭의 롤리타 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던 배우로

아마 처음에는 이 배우를 좀 키워주려고 했던 것 아닐까 싶네요.  롤리타에서는 잘했는데 이 영화에서도 초반부를 주도하긴 합니다.

하지만 에바 가드너, 데보라 커 등 베테랑 명배우들이 등장하면서 확 죽어버리죠.  역시 존재감의 차이란. 그래서 향후 스타가 되지 못했고.


리처드 버튼의 민망한 팬티 수영 장면이 이 영화 소개 스틸에서 많이 활용되는 장면이지요. 대사가 정신없이 많지만 대체적으로

꽤 재미난 영화입니다.  테네시 윌리암스 영화가 재미없는 작품이 없지요.


문제는 이 영화가 아직 블루레이 출시가 안되었는지 좋은 화질이 눈에 띄지 않네요.

1080p 영상이 있던데 확인해보니 용럄만 크고 썩 좋은 화질도 아니더군요.  더구나 1.85 : 1 비스타비전을 2.35 : 1 시네마스코프로

우스꽝스럽게 늘려놓은 화면이고.  그리고 제 자막이 25000 같은데 그 프레임에서 한 번 더 줄인 영상 같습니다.  이자막을 23,976->25000 으로

프레임 조정하면 그 영상에 딱 맞긴 하더군요.  일단 초기에 갖고 있던 영상을 링크할테니, 더 좋은 화질 발견하시면 알려주세요.

제 영상은 볼만한 비디오 화질 정도입니다.

The Night of the Iguana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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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S 토마스모어
이 영화도 기존 테네시 윌리암스 영화만큼이나 꽤 흥미롭습니다.
40 백마
고맙습니다^^
14 토마토
감사합니다.
37 Rookie
감사합니다
28 언제나
고맙습니다.
27 궁금맨
고맙습니다. ^^
35 Juliet
고맙습니다.
GIVE 3 MP 39 범부
감사합니다.
28 이야호
고맙습니다
37 보라™
수고하셨습니다^^
33 스피리투스
고맙습니다
29 불량아이
고맙습니다.
GIVE 3 MP 16 TylerDurden
고맙습니다.
27 십이야월
감사합니다
23 자막맨
감사합니다
S dreammaker
고맙습니다.
22 인향
고맙습니다.
10 넘조아
고맙습니다.
3 Tera129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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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토마스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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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토마스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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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컷과송
2023. 9. 9. 감상

단 평 : 정주를 위한 여정

<프로이트>의 존 휴스턴이 늦게나마 테네시 윌리암스와 조우한 것은 당연한 필연일 것이다.
허리 아래로부터 형성된 무의식이 과거/현재의 의식화된 추락과 결합함으로서 위선에의
단순한 응시를 넘어서 스스로를 주체로서 규정하는 과정은 재차 60년대 중반의 시대성에
'상업적으로' 부합한다. 본편의 성직자는 62년 <로리타>의 10대를 완전히 거부하지 못한다.
오프닝 예배당 밖에는 비가 내리고, 당당히 (?) 목사는 대중들에게 전투적 퇴장을 고했다.

하지만, 이같은 62년 희곡의 외형은 50년대라면 더욱 환영받았을지 모르나, 다른 맥락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지탄가능하다. 왜 종교인은 10대 소녀와 호텔 미망인으로부터 유혹의
대상으로 선정되어야하는지, 혹은 유랑하는 화가 여성은 그에게 초상을 그려주고 다시
무소유의 여정을 행하는지, 더군다나 19세기적 노시인은 왜 그 호텔에서 마지막 시를
완성할 수 있는지 등의 질문에 대해 본편은 그저 개인의 실존주의적 구원 이상이 아니다.

이구아나는 인간들에 의해 붙잡혀 사육되었다가 잡혀먹는 운명이라거나 시를 완성 후
곧바로 숨을 거두는 노시인이 모두 성직자 인물의 대속적 소비로 환유되는 어법은
배우들의 냉전과 열정이 뒤섞인 연극 연기에도 불구하고, 모던의 스크린에 적응하지
못한 어설픈 발기부전 치료에 가깝다. 어차피, 50년대적 중년 여성 집단은 버스 타고
돌아가버린 마당에 패배자가 된 남성 인물의 정주가 공동체를 향해 무엇을 설파할지
뒷담화가 궁금해지지는 않는다. 이구아나는 풀려나 숲으로 가지만, 여전히 동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