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말을 이기지 못한다. 여기서 누가 '아동'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애당초 모두가 아동일 수 있다는 가정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극히 프로이드적인데, 국가/군인 아버지의 초상은 여성의
곁에서 어떤 의미에서든 그녀를 질책하고 감시한다.
이같은 맥락에서 여성은 결혼 전후에 변함없이 '아동'이다.
그것은 여성의 아버지가 그녀의 지성-미덕을 찬양하는 것과는 관계없거나 혹은 그조차 의심하게 만든다.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의자는 매매되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도
남성의 허세에 휘말리는 소도구가 될 뿐이다.
반대편의 남성 역시 초자아가 상실된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에게는 가족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금전이라는 남근의 경계 밖으로 탈락되지 않기 위해서 언술이
가지는 사회적 기의성을 거의 준수하지 않는다.
남성은 극도로 타인의존적으로 자존감은 높을지언정 자존의 실체는 부여되지 않는다.
남성이 여성을 '몽키페이스'라고 호칭하는 데에는 이같은 남성의
자기 부재의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좀 더 심화하자면, 남성은 오히려 상상계에 머물면서 자본주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자라면
여성은 상징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내재화한 인물이다.
이 두 인물이 처음 만나는 공간이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기차라는
이동 하는 공간이라는 점은 이같은 맥락에서 중층적이다.
남성이 여성이 독서 중인 '아동심리학'책을 확인하는 프레임에서
카메라는 책을 바로 포착하지 않고 여성의 다리에서부터 상승한다.
여기서 여성의 다리를 남근 거세의 대체된 공포로 인지할 것인가는 낡고 부차적인 문제지만,
응시하는 자와 응시받는 자가 모두 '아동심리학'이라는 문자 서적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은 본편의 외부 개입이라는 점에서 친근하다.
단평 : 아기 양육 'Bringing Up Baby'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생각은 말을 이기지 못한다. 여기서 누가 '아동'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애당초 모두가 아동일 수 있다는 가정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극히 프로이드적인데, 국가/군인 아버지의 초상은 여성의
곁에서 어떤 의미에서든 그녀를 질책하고 감시한다.
이같은 맥락에서 여성은 결혼 전후에 변함없이 '아동'이다.
그것은 여성의 아버지가 그녀의 지성-미덕을 찬양하는 것과는 관계없거나 혹은 그조차 의심하게 만든다.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의자는 매매되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도
남성의 허세에 휘말리는 소도구가 될 뿐이다.
반대편의 남성 역시 초자아가 상실된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에게는 가족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금전이라는 남근의 경계 밖으로 탈락되지 않기 위해서 언술이
가지는 사회적 기의성을 거의 준수하지 않는다.
남성은 극도로 타인의존적으로 자존감은 높을지언정 자존의 실체는 부여되지 않는다.
남성이 여성을 '몽키페이스'라고 호칭하는 데에는 이같은 남성의
자기 부재의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좀 더 심화하자면, 남성은 오히려 상상계에 머물면서 자본주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자라면
여성은 상징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내재화한 인물이다.
이 두 인물이 처음 만나는 공간이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기차라는
이동 하는 공간이라는 점은 이같은 맥락에서 중층적이다.
남성이 여성이 독서 중인 '아동심리학'책을 확인하는 프레임에서
카메라는 책을 바로 포착하지 않고 여성의 다리에서부터 상승한다.
여기서 여성의 다리를 남근 거세의 대체된 공포로 인지할 것인가는 낡고 부차적인 문제지만,
응시하는 자와 응시받는 자가 모두 '아동심리학'이라는 문자 서적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은 본편의 외부 개입이라는 점에서 친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