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의의 순간(Deadlier Than The Male, Voici le temps des assassins...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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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의 순간(Deadlier Than The Male, Voici le temps des assassins...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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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여성이 종류별로(?) 이 영화에 여럿 나옵니다.^^ 

천하의 장 가뱅은 이 여자들 틈에서 '헤매고 고통받는' 

일종의 Mama's Boy입니다.

이 여성들의 묘한 심리가 영화의 볼거리입니다.

물론 제목대로 살인도 나옵니다만.


줄리앙 두비비에의 '프랑스 느와르'라고 합니다.

두비비에 영화답게 물흐르듯이 전개됩니다.

IMDB에 따르면'누벨바그 이전 쓰레기'로 간주되다가

베르트랑 타베르니에가 건져낸 영화라고 합니다.


여주인공의 성격 구현이 대단합니다.

1949년 프랑스 판 오리지날 <Gigi>의 주연이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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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GIVE 3 MP 16 TylerDu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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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umma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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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 3 MP 16 TylerDu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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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보라™
수고하셨습니다^^
39 범부
감사합니다.
S 토마스모어
줄리앙 뒤비비에나 르네 클레망 같은 대가들은 우습게 알았던 누벨바그 쓰레기들.
그들이 반짝 떠올랐다가 일찌감치 소재 고갈로 진부해질때 한참 선배인 두 거장은 여전히 수작들을 내놓으며 무르익은 솜씨를 보였지요.
그나마 누벨바그 어쩌고 했던 감독중 제대로 각성한 건 프랑소와 트뤼포 뿐이라고 봅니다.

장 가방과 줄리앙 뒤비비에, 1930년대부터 정말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지요.
장 가방이 있어서 줄리앙 뒤비비에가 빛났고, 줄리앙 뒤비비에게 있어서 장 가방이 있었고.

장 가방의 1930년대 영화중 국내 개봉작중에서만 '순백의 처녀지(Maria Chapdelaine 34)
우리들의 이상(La belle équipe 36), 최후의 망루(La bandera 35) 망향(Pépé le Moko 37) 골고다(golgotha 35) 등
둘이 같이한 영화들이 많이 개봉되었고, 줄리앙 뒤비비에는 30년대 할리우드 어지간한 감독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개봉되던
보기 드문 프랑스 감독이었지요.

감히 무자격한 어떤 후배들이 뭐라했던 프랑스 영화 연대기에서 줄리앙 뒤비비에와 르네 클레망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2대 거장이라고 봅니다.
무도회의 수첩과 나의 청춘 마리안느 두 편만으로도 누벨바그 어쩌구들이 이룬 업적 절반은 이룬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알려지지 않은 장 가방과 줄리앙 뒤비비에의 후기 합작품 이렇게 또 한 편 소중이 받아가겠습니다.
영상은 받아보고 여의치 않으면 도움 요청하겠습니다.
24 umma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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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토마스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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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dreammaker
고맙습니다.

추카추카 9 Lucky Point!

12 삿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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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umma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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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삿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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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컷과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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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umma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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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컷과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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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umma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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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jang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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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umma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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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umma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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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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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umma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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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인향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S 컷과송
2022. 5. 25. 감상


단  평 : 견고함에는 윤리가 없다


장르성이나 캐릭터를 말하는 것은 시간의 무게를 이겨내지 어렵다. 후인들은 시대의 추이에 따라 더욱
가혹하고 신랄한 상황과 배역을 연속시킨다. 보존되는 것은 장르가 아니라, 그것에 내재한 보수성이다.
이 보수성을 흔한 변증법이라고 하기는 꺼려진다. 인물이 고난 이후 변형 성찰된 인물이 된다는 고전성은
주체라는 본질주의를 노정한다. 하지만, 그나마 이같은 서사성은 변화라는 응시의 쾌감을 주입함으로서
상업성을 담보해왔다. 본편의 특이점은 이같은 전환을 무색하게 하는 견고한 위치의 고정에서 발현된다.

가령, 오프닝에서 빈민 여성은 지하에서 첫 등장함으로서 그녀의 정체성을 저급하게 지정한다. 대척점에
여성의 엔딩이 사람이 아닌 견공에 의해 보여지지 않는 타살로 장식됨을 진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그녀는 지상의 인간일 수 없음을 재론한다. 하지만, 전술했듯 여성은 장르와 서사의 중앙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중요하지 않다. 본편은 그같은 기색을 굳이 은폐하려 하지 않는다. ​소비되는 운명임을 인지하듯
여성을 맡은 배우는 살인의 순간에 최대한의 얼굴을 표출한다. 가난한 자의 죽음은 결국 발악이 된다.

​요체는 공간에 있다. 더럽고 복잡한 시장은 자본주의를 냉혹하게 지시하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보존된다.
이에 반해 인물의 장소인 레스토랑은 밖과 달리 계급적 지향성을 분명히 한다. 결말부의 만찬장이나
서두의 신문 기사는 불필요한 단락인 빈민의 식사 거부와 연결된다. 더불어, 인물의 모친이 운영하는
댄스홀 겸 숙박시설 역시 손님이 분빈다. 그들은 잠시 유혹받을 수는 있지만, 그들 자신의 폭력성에는
어떤 피해도 입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를 되새기며 카메라는 죽음을 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