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와의 나흘 밤 (Four Nights With Anna, 2008)

자막자료실

안나와의 나흘 밤 (Four Nights With Anna, 2008)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1250630


영화의 무국적성에 관한 대화 중...


아오야마 신지 : 예르지 스콜라모브스키의 신작 <안나와의 나흘 밤>도 국적성이 없었어요. 어디서 찍었지?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하스미 시게히코 : 저도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어떤 말도 필요 없는 훌륭한 영화였어요. 역시 무국적 영화 전문가 파올로 블랑코가 제작에 관여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죠


아오야마 신지 : 게다가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작품이에요. 디지털 카메라로 그런 무국적 영화를 찍다니, 최고의 영화입니다. 그런 시대가 오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 만든 자막을 살짝 다듬고 새 영상에 싱크를 맞춰서 올립니다.


상업적 용도로 이용을 절대 금합니다


"위 출처는 커뮤니티 '씨네스트'입니다. https://cineaste.co.kr 이곳에 오시면 다양한 피드백과 관련 자료가 있습니다. 아울러 스크립트를 이용한 불펌을 금합니다.

그리고 타 사이트 업로더 여러분께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저작권 문제로 삭제되더라도 가급적이면 퍼가시는 것보다는 링크로 연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Comments

5 뭘람마
감사합니다
40 백마
고맙습니다^^
14 밀크커피
감사합니다.
14 날뫼
감사합니다
37 보라™
수고하셨습니다^^
15 gaeul
고생하셨습니다
GIVE 3 MP 16 TylerDurden
고맙습니다.
S 컷과송
2019. 7. 21. 모임 후기


'너는 이미 죽어 있다'라고 시작해야겠다. 록님의 의견을 쫓아 남성 인물을 사회주의의 죽음으로
지정하든, 혹은 무국적 공간에서 운명론으로 좌표화하든 그에게서 할머니, 젖소를 분리하기 어렵다.
<화장터 인부>가 연상되는 소각로는 병원과 자신의 집 마당에서 잘려진 손과 유품을 처리한다.
그것들은 타인의 명의를 빌어온 그 자신의 것이다. 그는 곧 죽음으로 차분하게 등식화된다.

그러므로 또는 동시에 그는 죽음이기 때문에 시간이다. 죽음의 시간은 선형적일 수 없다.
관객은 그의 의상을 쫓아 혹은 시공간의 궤적을 정리하여 하나의 선형성을 완성해서는 안된다.
분절을 절합시키고 통일성을 회복시키는 것은 관객의 권리나 자리가 아니라 일종의 강박이다.
죽음에 인접한 시간에 구조를 부여하고픈 잔혹한 관습을 폐기할 수 있다면 공간에 당도가능하다.

폐기의 중요성은 공간에서도 종속된다. 통일되어서는 안되는 시간이 신뢰의 문제가 아니듯이
이 공간을 심히 믿을 수도 없다, 설사 안나가 간호사이고 오직 마트에서만 한 컷에 공존한다해도.
게다가 그 공간은 빗금쳐져 있다. 베가본드 님의 논지에 따라 본편을 영화에 대한 영화 장르로
치환하는 순간 윤리의 관문이 즉각 도래한다. 이것은 <이창>의 다리 부상과 같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인물 스스로 착종한다. 목격(베가본드 님 어법)의 순간에 이를 파괴하거나 혹은 소장하기
위해 육체가 파편(소년독본 님의 지적)화된다해도 이는 다른 공간에서의 자기 강간으로 복사된다.

이는 목격의 윤리에 대한 징벌(베가본드 님 단상)일 수 있지만, 가학/피학이라는 짝패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목격 자체의 외향성이 기실 내향성임을 지시하는 환타지에서의 위치 이동과도 같다.
본편에서 주체가 불구적인 것이 아니라, 관객이라는 위치의 목격이라는 행위의 속성이 SM적이다.
그럼에도 권력은 아버지의 법(벽)에 다다르기 전에 향락 jouissance을 중단할 수 없다. 그것은
지금 그 자리에서의 능동적 행위(프레임을 생성)에도 불구하고 환타지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다.
시계, 반지, 약물, 색칠 등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환타지는 목격으로 고정되지 않고 기표로 거부된다.

목격이라는 외부가 침입이라는 내부로 이행될 때 이의 자격과 권리보다는 이를 속성으로 단정하면
영화의 무기력(베가본드 님 의견)이 문제가 아니라, <이창>의 완결성 반대편에 오히려 본편의
정당성에 동의하거나 지지를 보낼 수도 있다. <이창>은 결국 외부를 내부를 통해 장악하고 목격의
불구성을 정상화시키는 환타지를 통일화시켰다면 본편은 죽음 위에서 목격을 애당초 불구화한다.
관객을 정치화된 영화 안으로 순응시키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소외시키는 것, 이것이 영화의 정치다.
S nonorhc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S 컷과송
댓글내용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