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Early Spring, 1956) 무명 City님이 올리신 자막을 하나로 합쳤습니다

자막자료실

이른 봄 (Early Spring, 1956) 무명 City님이 올리신 자막을 하나로 합쳤습니다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1227729


블루레이판으로 1CD로 합쳤습니다.

2CD에 반복되는 부분이 있어서, 거길 편집했고, 싱크도 맞춘 상태입니다.

무명 City님께 감사드립니다. 

"위 출처는 커뮤니티 '씨네스트'입니다. https://cineaste.co.kr 이곳에 오시면 다양한 피드백과 관련 자료가 있습니다. 아울러 스크립트를 이용한 불펌을 금합니다.

그리고 타 사이트 업로더 여러분께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저작권 문제로 삭제되더라도 가급적이면 퍼가시는 것보다는 링크로 연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Comments

GIVE 3 MP S 푸른강산하
감사합니다.^^*

추카추카 11 Lucky Point!

15 Barbarian
수고 하셨습니다~~~!!!
28 이야호
고맙습니다
16 해피데이
감사합니다
1 방그레
감사합니다.
19 최대포
고맙습니다.
32 블랙이글
수고하셨습니다.^*^
S 궁금맨
고맙습니다.
37 Rookie
감사합니다
33 스피리투스
고맙습니다.
21 앵두봉봉
감사합니다
S 영화이야기
Early Spring (1956) [BluRay] [1080p] [YTS.AM]

추카추카 6 Lucky Point!

13 평범한사내
고맙습니다.
37 보라™
수고하셨습니다^^
5 pfunkpfama
고맙습니다

추카추카 30 Lucky Point!

47 CaMillo
감사합니다.^^*
9 패도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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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큰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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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 3 MP 40 백마
고맙습니다^^

추카추카 3 Lucky Point!

5 미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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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불량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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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farlu
감사합니다.
10 김이장
감사합니다
23 다솜땅
감사합니다..*^^*.
10 넘조아
고맙습니다.
S 컷과송
2022. 12. 7. 재감상


단 평 : 되돌아간다는 것의 다름


아내가 말한다, "당신 어제밤에 오차즈케 먹었잖아". 여기서 친절함은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전작 <오차즈케의 맛>을 본편이 승계 연장했다는 의미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 말 이전에 아내는 아침은 '빵'이라고 말함으로서 본편이 단순 반복이 될 수 없음을 예언한다.

하지만, 프레임은 어제밤의 오차즈케도 아침의 빵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두 가지인데, 먼저 관객은 '많음'을 접하게된다. 일방향으로의 위태로운 출근길 직장인 군중.


그들이 지금과 같은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지 않은 시대에서 아슬아슬하게 전철을 기다리는

모습을 반전시키는 것은 그들의 기이한 동행이다. 출근길 모임이라는 구성원들은 개별적인

자신만의 혹은 그들만의 시퀀스를 부여받음으로서 <오차즈케의 맛>의 반경을 전철처럼

집단으로 확대한다. 상호적인 소문과 심문을 부가함으로서 단독적이었던 전작의 관계성을

확연한 집단적 보수성으로 퇴행시킨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의 시간으로서의 기차가 있다.


기차는 흔한 근대의 표지 따위가 아니라 직진성 그 자체로서 기표화된다. 즉 멈춤의 기차가

아닌 돌진하는 기차는 관념적인 시대성이라기보다 흐름으로서의 시간으로 방출된다.

허무를 기적화하는 기차의 면모는 30년대의 오즈의 지표의 복귀와 더불어 불가해한 포용을

재림시킨다. 초반부 창 아래로 동경 도심의 인파를 '범람'이라 설파한 바의 반대편에 엔딩의

부부가 지극히 인공적인 일방향적인 시선의 견지로 굴뚝과 연기, 그리고 기차가 있다.

여기에는 사람이 없음을 넘어 정확히 사람이 없어야한다는 간결한 의지가 있다고 해야겠다.


30년대 오즈의 인장 중에 2층에서 내려다봄은 종종 그 아래 인물과의 시선 일치 혹은 그의

행로에 대한 확인이 있었다면 그로 인해 2층과 길 아래는 일종의 소통을 행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편은 거기에 인간을 배제시킨다. 물론, 이는 30년대 초기에서도 보여진 풍경이지만,

그와는 달리 이번에는 기차가 더해진다. 수직과 그 수직을 허무는 흐름으로서의 연기는 후경의

기차의 운동을 예견하듯이 프레임을 수직/수평의 견고함 밖을 배웅한다. 인물을 휘감던 죽음의

예시들이 일탈과 연결되어 결국 동경 밖으로 내칠 때에도 부부의 시선은 인공적으로 합치된다.

그러나, 이 단언이 곧바로 부부가 동일한 속내로 2층에서 밖을 바라본다고 확증하기 어렵다.

후인의 작품 <아사코>처럼 부부는 강물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감지할 수도 있음을 상기하면

본편의 동경 밖 2층, 그리고 인공적 부부로서의 시선 밖 사람없는 풍경을 마냥 환영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