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Phantom, 1922)

자막자료실

유령(Phantom,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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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과송님 요청자막입니다. 


어느 외곬수 남자가 여자에 대해 품는

사랑인지 집착인지 환상인지가 내용입니다.

영화 속 색채가 시퀀스마다 달라지는 게 특이합니다.

꿈 속을 헤매는 듯한 환상 장면이 인상적이고요.


주인공 남자 역을 한 배우가 나이가 너무 들어 보이는 게

영화 내내 걸리긴 합니다만, 연기는 좋습니다.

숙모 역을 한 배우의 연기가 든든하게 영화를 받쳐 줍니다.


원제:Phatom(1922)

연출: F. W. Muranau


무성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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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1 비오는새벽
정말 감사드립니다.

추카추카 23 Lucky Point!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는 1919년에서 1929년까지 단 10년 동안에 21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그 중 17편은 독일에서 나머지 3편은 미국의 폭스사와 합작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유성 영화가 도래하기 전 무성영화의 시대는 바로 무르나우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작품들은 눈부십니다.
 
하지만 무르나우는 한편으론 가장 불행한 영화작가이기도 합니다. 1931년 로버트 플래허티와 공동 작업으로 <타부>를 완성한 후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에서 자동차 사고로 43세의 나이로 사망 합니다. 이후 그가 만든 영화는 절반 이상 소실되었고 현존하는 영화는 12편뿐이기 때문입니다.

타이틀을 보시면 알겠지만 영화 <유령>은 에리히 폼머가 운영하는 ‘데클라-바이오스코프’ 영화사에서 만든 영화입니다. 이 영화사는 나중에 전설적인 영화사인 UFA 영화사에 합병됩니다. UFA는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같은 걸작 영화를 만든 영화사지요.
<유령>은 당대 최고의 극작가로 알려진 게르하우트 하우프트만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1922년 11월 20일에 첫 극장 개봉을 하였는데 이 날이 하우프트만의 생일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들판에서 한 노신사가 책을 들고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하우프트만입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소설을 각색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면서 시작하는데 각색을 담당한 사람이 프리츠 랑 감독의 부인으로 독일시대 랑의 영화의 시나리오 전편을 담당했던 테아 폰 하르보우입니다. 나중에 랑과 결별하고 나치를 위한 선전물의 시나리오를 쓴 인물이기도 하지요.

영화가 개봉된 후에 엄청난 비난이 이어졌는데 이 비난은 무르나우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테아 폰 하르보우의 시나리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얄팍하고 가식적이며 그림 엽서 정도의 수준의 작품이라는 식의 비난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르보우의 영향 때문에 <유령>은 무르나우의 남아있는 영화 중 독일 표현주의의 관습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기도 합니다.
한 남자의 긴 플래시백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인물들의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갈등이 이어지다가 급작스런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은 무르나우의 <마지막 웃음>(1924)만큼 당혹스럽기에 위대한 영화 학자였던 벨라 발라즈가 ‘고통스러울 정도’라고 비판을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괴테의 <파우스트>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독일적’인 영화입니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 = 유령’으로 규정하듯이 이 영화에서 시인 지망생을 영혼을 앗아간 유령의 정체는 타락한 자본주의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영화에서 ‘유령’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위력을 과시합니다. 시인 지망생의 마음을 빼앗은 부르주아 여인은 유령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녀에게 마음을 뺏긴 시인 지망생은 허상을 좇으며 숙모의 돈으로 치장을 합니다. 그는 귀신들린 존재입니다. 그의 여동생도 환락에 빠져 자신의 몸을 판다는 점에서 똑 같은 존재입니다.

또 시인 지망생이 숙모에게 시 저작권까지 담보로 잡히며 돈을 빌리는 모습에서 악마 메피스토팔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를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로베르트 비네 감독의 표현주의 영화의 시초 <칼리갈리 박사의 밀실>(1919)의 영향 아래 있다는 점에서 더욱더 ‘독일적’인 영화입니다.
영화학자 지그문트 크라카우어는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 독일 영화의 심리학적 역사>(1947)라는 책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영화들을 분석하면서 그 시기 독일인들의 정신상태를 분석하면서 히틀러가 왜 등장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추적합니다.

크라카우어가 가장 중시한 영화 텍스트는 비네의 <칼리갈리 박사의 밀실>인데 이 영화에서 칼리갈리 박사는 선량한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살인을 교사합니다. 칼리갈리 박사의 모습은 1차대전의 패배로 자포자기한 독일인들을 선동한 히틀러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영화 <유령>에서 시인 지망생을 꼬드겨 전당포를 운영하는 숙모 살해에 동참하게 만드는 건달에게서 칼리갈리와 히틀러의 그림자를 목격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우리를 압도하게 만드는 것은 다음 두 장면 때문입니다.
먼저, 주인공이 빌린 돈을 갚지 않으면 경찰에게 고발하겠다는 숙모의 호통을 듣고 길거리를 걸어가는 장면입니다. 이 때 크고 화려한 집이 갑자기 주인공 남자를 향해 위협하듯이 기울어집니다. 첨탑의 그림자가 주인공을 향해 찌를 듯이 돌진하는 이 장면은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잘 표현한 명장면입니다.

다른 하나는, 타락한 주인공 남자가 고급 술집 테이블에 여자와 앉아 있을 때 테이블이 갑자기 터널 속으로 쑤욱 빠지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자전거를 탄 남자 실루엣이 터널 주위를 미친 듯이 질주합니다.
그러다가 카메라는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스테디 캠 촬영처럼 춤 추는 사람들 주위를 빙빙 돌아갑니다.

표현주의 영화의 특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 장면만으로도 <유령>은 우리가 꼭 봐야 하는 걸작입니다.

흔히들 <유령>은 무르나우 영화의 ‘잃어버린 고리’와 같은 영화로 평가를 합니다.
저도 이번 기회에 말로만 듣던 이 영화를 보게 되어 너무나 기뻤습니다.

영상 제공과 번역을 해주신 umma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겐 너무 큰 명절 선물이 되었습니다.

p.s.) 앞에 잠깐 소개한 무르나우의 마지막 작품 <타부>(1930)는 유성영화 시대의 무성영화이며 다큐멘터리 <북극의 나누크>(1922)를 만든 로버트 플래허티와 만든 다큐멘터리이자 극영화입니다. 이 걸작이 번역이 되어있지 않은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꼭 한번 번역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24 umma55
길에서 건물이 넘어지는 장면은 정말 특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 자본주의와 히틀러처럼 큰 걸개보다는
매우 개인적인 시각으로 영화를 봤습니다.^^

주인공 시청서기라는 인물은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고 현실감이라고는 거의 없으며(물론 시인 지망생이니...^^)
매우 폐쇄적인 사람에다가 직장에서도 무능한 걸로 나옵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사랑을 하게 되니
순조롭게 일이 풀릴 리가 없습니다.
물론 돈도 없으니 여자에게 구혼하기도 어렵지만,
거짓말로 돈을 빌려서 여자에게(그것도 얼굴만 닮은 다른 여자)
환심을 사려는 행동을 보면
Character is Fate라는 경구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전 이 영화를 일종의 '캐릭터 스터디'쯤으로만 봤습니다만,
해설을 읽어 보니 유익하네요. 늘 감사합니다.

<타부>는 조만간 하려고 구해 놨습니다.
대사라고는 거의 없는 영화더군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년, 소녀의 사랑도 아름답지만 바다가 진정한 주인공 같은 영화죠.
29 불량아이
감사합니다.
S 컷과송
2019. 3. 12. 감상


단평 : 비존재가 공허를 생산한다.



누구의 손길에 의해서 본편과 같은 괴작이 탄생했는지는 미지수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원작 소설과 테아 본 하르보의 각색,
에리히 폼머의 제작 그리고 F.W.무르나우의 연출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들 모두의 복합적인 결과물일 것은 불문가지다.

본편의 단선적이면서도 동시에 비선형적인 내러티브는
 동시대인 프란츠 카프카와 후인 알베르 까뮈의 혼종을 연상시킨다.
단순한 환타지 로맨스로 출발한 서사는 한순간 공허 자체를 확인하지도 못한 채
 대역을 통한 살인과 그 과정에서의 황망한 성찰로 관객을 모독한다.

이같은 서사 안에서 관객은 애당초 백마 탄 여인의 존재가 실재하지 않음을 응시한 이후에도
 흡사 여동생과의 근친상간, 모친-숙모에 대한 존속살인의 환영과 마주하게 된다.
중심부가 존속함에도 불구하고 중심부가 실종되는 해체의 귀결은
 본편을 현대 영화의 근저리에 서성거리게 한다.
이는 여러모로 후인 페데리코 펠리니의 공간을 상기시킨다.

만일 본편을 '유령'이라 호명할 수 있다면 여기에는 접두 수식어로
'미리 찾아온'이라는 문구가 배당되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편보다 1년 먼저 제작된 빅터 쇠스트롬의 <유령 마차>와 동년에
 자신이 연출한 <노스페라투>가 연상되는 백마 탄 여인과 이를 쫓는
 오버랩 이미지는 몽환성 너머에서 갑자기 자본에의 탐욕과 교차한다.

전작에 이은 감독의 인장으로서 굴곡된 거리에서의 인물에 대한
 롱숏은 본편에서 뒤돌아보는 순간 <인셉션>의 원류의 흔적을 드러낸다.
건물이 인물을 위압하는 이미지는 곧이어 표현주의의 그림자의 공포로 연속되며
 급기야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 대리자로서의 여성과의 공간을
 크레인숏으로 급격히 상승시키는 운동 이미지가 서커스 공간과
 환타지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에서 최절정에 도달한다.
40 Daaak
감사합니다.
10 넘조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