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이 누구의 시선일 수가 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시선일 필요가 있는가이다.
왜냐하면, 이에 대비되는 엔딩에 사람의 얼굴(들)이 배치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배치란
단순히 사람의 유무뿐 아니라,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 유무가 지정됨을 의미한다.
폭발과 침몰에는 누구의 시선도 필요하지 않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데는 시선이 필요하다.
이 시선에는 체험으로서의 과거로서 인물이 필요하고, 그 인물들은 내내 주체를 불구화한다.
죽은 채 발견된 아기를 제외한다면, 죽은 사람들은 모두 정신질환의 주변을 맴돈다.
특히 영화는 독일군을 윤리라는 측면에서 하품, 나침반, 술병 속 물 등을 통해 이탈시킨다.
뒤집어 말하면,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남겨진 자들은 논쟁할 뿐 정신질환에 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결합되거나 서로를 존중하게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들은 벗겨져야한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가족 구성체를 진술할 수 있는 인물이 히치콕 영화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 흑인 남성이라는 점은 흥미롭지만, '짐꾼 죠' 나 신앙의 위치에 서는 한계는 지속된다.
오프닝이 흥미로운 다른 이유는 그것이 거의 유일하게 구명선 바깥에서 카메라가 위치하고
천천히 구명선으로 이동하기 때문인데, 이 와중에도 히치콕은 여성 1인을 먼저 구명선에
배치하고 그녀가 마치 폭발과 상관없는 인물인 것처럼 규정한다. 더하여 카메라는 그녀의
다리를 포착함으로서 본편이 여전히 히치콕의 여성극의 흐름 안에 있음을 엔딩의 마지막
대사를 그녀가 발화하는 것과 더불어 인증한다. 그녀의 팔찌가 다시 카메라가 배 바깥에서
위치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장치라는 점도 추가될 수 있겠다. 그녀와 흑인 남성이 다시
등장한 반복으로서의 독일군의 권총을 제거해버리는 공동 행동의 주체임도 동일 맥락이다.
그녀가 기록하는 자(카메라 등)에서 기억하는 자(죽음, 윤리)로 이동할 때 삶은 구조된다.
감사합니다
단평 : 밖은 허락되지 않지만, 결국 내부에 가족이 있다.
오프닝이 누구의 시선일 수가 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시선일 필요가 있는가이다.
왜냐하면, 이에 대비되는 엔딩에 사람의 얼굴(들)이 배치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배치란
단순히 사람의 유무뿐 아니라,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 유무가 지정됨을 의미한다.
폭발과 침몰에는 누구의 시선도 필요하지 않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데는 시선이 필요하다.
이 시선에는 체험으로서의 과거로서 인물이 필요하고, 그 인물들은 내내 주체를 불구화한다.
죽은 채 발견된 아기를 제외한다면, 죽은 사람들은 모두 정신질환의 주변을 맴돈다.
특히 영화는 독일군을 윤리라는 측면에서 하품, 나침반, 술병 속 물 등을 통해 이탈시킨다.
뒤집어 말하면,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남겨진 자들은 논쟁할 뿐 정신질환에 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결합되거나 서로를 존중하게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들은 벗겨져야한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가족 구성체를 진술할 수 있는 인물이 히치콕 영화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 흑인 남성이라는 점은 흥미롭지만, '짐꾼 죠' 나 신앙의 위치에 서는 한계는 지속된다.
오프닝이 흥미로운 다른 이유는 그것이 거의 유일하게 구명선 바깥에서 카메라가 위치하고
천천히 구명선으로 이동하기 때문인데, 이 와중에도 히치콕은 여성 1인을 먼저 구명선에
배치하고 그녀가 마치 폭발과 상관없는 인물인 것처럼 규정한다. 더하여 카메라는 그녀의
다리를 포착함으로서 본편이 여전히 히치콕의 여성극의 흐름 안에 있음을 엔딩의 마지막
대사를 그녀가 발화하는 것과 더불어 인증한다. 그녀의 팔찌가 다시 카메라가 배 바깥에서
위치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장치라는 점도 추가될 수 있겠다. 그녀와 흑인 남성이 다시
등장한 반복으로서의 독일군의 권총을 제거해버리는 공동 행동의 주체임도 동일 맥락이다.
그녀가 기록하는 자(카메라 등)에서 기억하는 자(죽음, 윤리)로 이동할 때 삶은 구조된다.